설 연휴가 다가오자 긴장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며느리들이다. 천지가 개벽했다 해도 며느리는 며느리인 법. 시댁에선 마음 편히 엉덩이 한번 바닥에 붙이지 못 하는 게 며느리의 운명이다. 거기에다 시어머니 구박이나 타박까지 더해진다면 며느리 눈에서는 정말 피눈물이 난다.
"인종도 언어도 문화도 다르지만 우리는 마음으로 통하는걸요?" 성아린(32) 씨는 10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이쯤되면 '시' 자만 들어도 끔찍하다는 시월드 공포가 올법도 한데 아린 씨는 그저 해맑게 웃는다. 우즈벡 며느리와 한국 시어머니. 이 둘은 어쩜 이렇게 사이가 좋은 걸까. 기자는 아린 씨의 집을 찾아 이야기를 나눠봤다.
-한복이 너무 잘 어울린다. 아린 씨는 어떻게 한국으로 와 결혼까지 결심하게 됐나
▶2014년도 남편이 서울 회사에 다니다가 우즈백으로 해외 근무를 왔다. 그리고 나도 그때 현지 직원을 채용한다고 해서 지원을 했었다. 내가 4개 국어를 하는데 그게 채용에 있어 큰 점수를 받았나 보더라. 그때부터 남편과 함께 파트너로 일을 하게 됐다. 그렇게 1년 연애하고 우즈벡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 와서 한번 더 결혼식을 올리면서 부부가 됐다.
-벌써 결혼 10년차다. 처음에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양가 부모님들이 많이 놀라셨을 것 같다.
▶우즈벡은 현지에서 먼저 결혼을 해야 한국으로 출국할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야 남편이 인사도 오고 얼굴도 보고 했기 때문에 괜찮았는데 한국에 계신 어머님이 정말 놀라셨다. 한국에서 우즈벡을 오려면 이틀 정도 소요되고 어머님도 직장을 다니시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상통화나 카톡으로 밖에 소통을 못했다. 랜선 결혼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때 어머님은 말도 안 통하는 며느리를 품어 주셨다. 말 보다 마음 소통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 하셨다.
-지금이야 인터뷰도 이렇게 잘 하실만큼 한국말이 늘었지만,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좌충우돌이 있었겠다.
▶그래서 남편이 한국에 와서 3년은 어머님과 같이 살자고 하더라. 남편이 해외출장이 잦은 직업이다보니 내게 어머님이 필요할 거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이 간섭 안하고 쿨한 성격이라 남편도 그렇게 제안했지 않나 싶다. 한국 문화나 언어, 음식 등을 어머님에게 배우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나도 흔쾌히 오케이 했다. 지금 인터뷰하는 이 집 아래층에 어머님이 사신다. 아래층에서 어머님이랑 3년을 살고 우리는 위층으로 이사왔다.

-분가할 때 멀리 이사 안 간 것만으로도 화목한 고부관계가 증명되는 것 같다.(웃음) 같이 살았던 3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어머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한 식구니 살다보면 가까워진다. 옆집하고도 사는 방식이 다른데 외국은 더 다를 수밖에 없다. 시간이 해결해줄거다.' 어머님이 이래라 저래라 하신 것은 없다. 내가 눈치껏 한국 문화를 배웠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머님 친구분이 집에 놀러오시면 '아 이렇게 친구를 대접하는구나' 함께 외식을 가면 '식당에선 미리 수저를 놓으면 되는구나'라고 눈치챘다.
어머님이 워낙 잔소리가 없는 분이셔서 오히려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더 많이 물었었다. 한국말은 다문화센터에서 일주일에 한번 선생님이 나오기도 하고 어머님이랑 같이 지내며 소통하다 보니 어느새 말도 늘더라.
-그래도 말이나 문화가 달라서 의도치 않게 오해가 쌓인 적도 있을 것 같다.
▶오해까지는 아니지만 우즈벡 말로 '싫어요' 라는 단어는 진짜 싫어서가 아니라 한국어로 '괜찮아' 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래서 한국말 '싫어요'도 그런 의미인 줄 알았다. 한날은 어머님이 음식을 만들 때 계란을 넣으면 더 맛있다고 하시길래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싫어요'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말의 뉘앙스가 다르다는걸 깨닫고는 어머님께 죄송하더라. 어머님한테 말했더니 기억도 안 난다며 웃으시더라.
-요리도 어머님께 배우신거냐.
▶처음에 어머님은 안 가르쳐 주신다 하셨다. 그냥 본인이 해서 나눠주면 되지 힘들게 요리하지 말라는 주의셨다. 그런데 남편 입맛이 문제였다. 남편은 어머님이 직접 만든 고추장, 김치를 먹으며 자라다 보니 밖에서 판매하는 음식은 안 먹더라. 그래서 분가도 해야하고 하니 어머님께 배웠다. 이제는 단술(식혜)도 잘 만든다.

-고향 음식과 아무래도 많이 다를 것 같다. 이제는 적응을 했나
▶처음에 어머님이 내가 한국 음식이 생소할까봐 집에 빵 굽는 오븐을 사놓으셨더라. 우즈벡식으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배려였다. 하지만 지금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다. 사실 우즈벡 음식이랑 많이 다르긴 하다. 한국에는 마늘,간장, 설탕, 고추장, 고춧가루 등 양념을 많이 쓰는데 우즈벡은 써봤자 마늘이나 소금 정도다. 그래서 처음엔 한국음식이 많이 매웠다.
-어머님 말고 다른 시댁 식구랑도 잘 지내나. 한국 속담에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가 더 밉다는 말도 있다.
▶그 말 들어봤다.(웃음) 하지만 우리 시누는 내가 한국으로 올수있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남편을 우즈벡에서 처음 만났다고 말했지 않나. 시누도 그때 같이 우즈벡에 나와 있었다. 시누는 통역일을 하러 나와있었기 때문에 영사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에 비자 발급이 좀 어려웠었는데 시누가 애를 많이 써줬다. 또 한국에 계신 시어머니에게 내 이야기를 엄청 잘 해 줬다. 그래서 나를 직접 만나보지도 못한 어머님이 나를 좋게 봐주셨다.

-시댁 갈등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설마 아이 키우는 방식으로도 갈등이 없었나.
▶하하. 고부열전이라는 TV 프로그램 아느냐. 다문화 며느리와 한국 시어머니가 갈등하는 프로그램이다. 거기 작가님도 저희 고부를 출연시키려고 갈등이나 마음이 안 맞았던 부분을 계속 물어 보셨었다. 그런데 없는걸 뭐 어쩌나. 그래서 고부열전에 출연을 못 했다. 육아도 우리 고부는 마음이 꼭 맞더라. 딸 예림이를 낳았을 때 어머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미역국도 끓여주고 애 씻기는 것부터 기저귀 가는 것까지 다 도와주셨다. 그리고 육아에 있어 유별나지 않은 부분이 꼭 통했다. 이건 어머님이 나에게 고마워 하시던데 요즘 젊은이들은 애 키울 때 너무 끼고 키워서 어른들이랑 트러블이 난다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오히려 풀어놓고 키우는 편이라 어머님과 갈등이 생길 일이 없었다. 이렇게되면 고부열전에 이어 신문에도 못 나가는거냐.
-하하. 아니다. 나는 갈등 없는 고부를 찾아 온 것이다. 주변 외국인 친구들도 아린 씨네 집처럼 다 이렇게 화목한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시어머니가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제 친한 친구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서 만날 때 마다 하소연을 한다. '너희 시어머니는 안 이러셔?' 라고 물을 때 마다 할 말이 없다.
-이제 곧 설이다. 설날은 보통 어떻게 보내나
▶우리 집은 제사가 없다. 그래서 그냥 좋아하는 음식 몇가지 해놓고 모여서 이야기 나누고 지낸다. 그래서 그런지 명절 증후군도 없다. 명절을 지내고 나면 다들 "한국 며느리로 명절 보내니까 안 힘들어?" 하시는데 사실 우즈벡 명절이 더 힘들다. 7~80명 가족이 모여서 파티하듯 보내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한국 설날이 조용하게 지내간다고 생각했다.
아린 씨와의 인터뷰가 마무리될 무렵. 시어머니 이말순 씨(61)가 이말은 꼭 해야겠다며 운을 뗀다. "내가 좋은 시어머니가 아니라 우리 아린이가 좋은 며느리다. 흠 잡을래야 흠 잡을 게 없다. 이런 며느리가 어딨나."
서로가 최고라는 고부 사이를 보니 새삼 부끄러워지는 하루. 언어, 문화, 인종이 같음에도 우리는 서로의 다른 점만 흠 잡으려 하지는 않았을까. 다가오는 설 명절엔 우즈벡 며느리와 한국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곱씹어보길. "양기 옐린기즈 빌란 (우즈벡 말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 사진 임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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