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30> 바리코의 ‘노베첸토’ : 대서양 위의 피아니스트

이경규 계명대 교수

'노베첸토'의 영화 버전인 '피아니스트의 전설' 한 장면. 네이버 캡처
'노베첸토'의 영화 버전인 '피아니스트의 전설' 한 장면. 네이버 캡처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노베첸토'는 배에서 태어나 30대 중반까지 배 안에서 살다 죽은 어느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다.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제목과 같은 노베첸토다. 그는 1900년에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여객선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상자에 담겨 연회장 피아노 위에 버려진다. 부드먼이란 이탈리아 선원이 아기를 주워 키운다. '1900년'에 착안해 '노베첸토 novecento'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어 노베첸토는 900이면서 1900년대라는 뜻도 된다고 한다.

부두먼은 아이를 빼앗길까 봐 출생 신고도 하지 않고 배 안에서만 키운다. 그러나 그는 노베첸토가 8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선장이 노베첸토를 육지로 내보내려고 하는데 노베첸토는 사라지고 없다. 한참 뒤에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피아노 앞이다. 언제 누구에게 배웠는지 천재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있다. 이날 이후 노베첸토는 독주도 하고 밴드와 협연도 하며 선상의 피아니스트로 살아간다.

그의 연주는 기존의 음악이 아니다. 악보도 반주도 음향장치도 없는 노베첸토의 연주는 그 자신이 곧 음악이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 음악은 새로 탄생한다. 그와 함께 트럼펫을 연주하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노베첸토의 음악은 그전에 존재하지 않은 음악이고 그 후에도 존재하지 않을 음악'이라고. 그것은 일회적인 하나의 사건이다. 그의 독보적인 연주는 입소문을 타고 육지에 알려진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모턴이 노베첸토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배에 오른다. 노베첸토의 연주를 들은 그는 고개를 떨구고 황급히 배를 떠난다. 사람들은 노베첸토가 육지에 가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유혹하지만 그는 배와 운명을 같이 한다. 훗날 배가 낡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할 때 그는 숨어 있다가 같이 산화한다. 1930년대 중반이다.

작가 바리코는 왜 저런 상상을 한 걸까? 책이 나온 것은 1994년이지만 서사의 배경은 1920∼30년대다. 지금 같은 녹음·음향 기술이 발전하기 전이다. 1935년에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로 인해 예술의 아우라가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아우라는 유일무이한 원본이 특정 공간에서 내뿜는 신비한 기운을 말한다. 발전한 사진술 덕분에 어떤 명화든 전 세계에서 똑같이 볼 수 있게 되면서 그런 아우라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아우라의 상실은 예술의 민주화요 대중화라고 생각했다. 반가운 발전이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미술과 달리 음악은 복제할 수 없고 언제까지나 현장의 아우라를 유지할 줄 알았다. 그러나 1940년대부터 발전한 녹음·음향 기술은 음악도 완벽하게 복제해낸다. 언제 어디서든 같은 음악을 무한히 반복해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벤야민의 논리라면 음악의 아우라도 사라졌다. 물론 음원보다 라이브가 더 감동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반대도 적지 않다.

바리코는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면서 탁월한 음악가다. 그는 20세기 전반까지 유지되던 음악의 아우라를 몹시 그리워한 것 같다. 대서양 한복판에서 악보도 없는 신비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아우라의 체험이 될 것이다. 노베첸토의 음악에 빠진 한 미국 상원 의원이 배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소란을 피운 에피소드는 호머의 사이렌과 오디세우스를 연상시킨다. 완벽한 디지털 복제로 인해 음악의 아우라가 사라진 현대에 저 사이렌의 환생을 꿈꾼 것이 '노베첸토'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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