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건표의 인세이셔블 연극 리뷰] ‘인간의 고독과 분열된 욕망’, 서울시극단 고선웅 연출의 <욘>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고선웅 연출의 연극 '욘' 마지막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고선웅 연출의 연극 '욘' 마지막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한 사업가(권력자)의 성공과 좌절, 그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고독과 욕망들이 실타래처럼 엮여져 클래식 드라마(고전극)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욘>(서울시극단, 세종씨어터 M)의 이야기다. 원작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John Gabriel Borkman)은 <인형의 집>,< 사회의 기둥들>, <유령>,< 민중의 적>, <페르퀸트>, <왕위주장자들>, <헤다 가블레르> 등 23편의 희곡을 남긴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의 작품이다. 연극학자로 입센 작품을 번역하고 연구해온 공로로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로 부터 지난해 훈장을 받은 김미혜 교수가 원문으로 되어 있는 입센희곡을 10권 23편으로 완역(完譯)해 입센 전집 10권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세편의 희곡중 4막으로 구성되어 있는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의 장막 서사를 탄력적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고선웅 연출이 각색했다. 희곡의 제목은 극중 인물의 주인공 이름이다.

고선웅 연출의 연극 '욘'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고선웅 연출의 연극 '욘'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 128년 전 입센의 이야기, 현재로 돌아온 고선웅표의 <욘>

입센의 희곡은 시공간의 사실적인 묘사와 극중 인물에 투영 되어 있는 현실감 있는 대사에 있다. 고선웅은 언어극의 극적인 리듬을 느낄 수 있도록 100분 공연을 연극적인 구조로 극을 진행시키면서도 극중 인물들의 캐릭터는 삶의 욕망이 분열되어 가는 인간의 이미지로 부각시킨다. 대사는 현시대에 살아가는 삶의 전경과 인간으로 동일화 되어 내면을 파고들 정도로 현실적이다. 입센의 극은 고선웅표로 전환되어 무대에서 드러나는 치밀한 극적구조와 대립감은 대사사이로 갈등을 증폭시키고 사이의 침묵은 고독한 절망의 전류로 덥힌 설산(雪山)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마치 욘이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죽어서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한 가지를 더해 고전극을 웃음과 비극성으로 템포감 있게 몰고 가는 치밀한 연출 감각도 돋보인다. 4막 대단원의 고지에 이르면 고선웅은 기다렸다는 듯 휘몰아 칠 것만 같은 폭설 같은 전경을 쏟아낸다. 관객은 '헉'하는 소리를 내며 긴장된 채로 고정된다. 무대는 일순간 눈보라 치는 산정(山頂)으로 전환되고 마지막 장면까지 극적으로 변주된다. 반드시 무대에서 스파크를 내는 고선웅의 연극성은 이번 작품에서도 한방 '훅' 하고 들어오며 강렬한 무대를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서울시극단은 입센 작품과 인연이 많은 편이었다. 김광보 연출은 시극단 예술 감독 시절 13세기 노르웨이, 스베레왕 서거 후 벌어진 왕권 다툼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입센의 <왕위주장자들>를 제20대 대통령선거 직후 무대화해 절대권력 쟁취를 둘러싼 치열한 암투와 음모, 인간의 추악한 갈등을 대선정국을 치른 한국사회의 기형적인 권력 현상으로 풀어냈다. 한국사회의 모순된 정치권력 구조로 환기해 표면화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면, 1896년에 쓰인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이라 불리는 한 남자의 128년 전의 이야기는 달라질 수 없는 재력사업가의 몰락을 보는듯하다. 사업가로 부와 명예를 축적했던과거에만 매몰되어 있는 실패한 중년의 남자는 고독한 절망에도 부의 권력을 이룬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집착하는 인물이다. <욘>의 서사는 이렇다. 극중인물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이남희 분, 이하 욘)은 가문의 대물림으로 막대한 재산과 부를 축적한 출세한 은행(금융)사업가다. 욘은 현실판 일부 재벌이부패로 구속된 것처럼 소유한 은행이 파산한 뒤 이야기다. 8년 동안 구치소와 교도소 생활을 한 뒤 출소한 후에도 8년 동안 가족과 관계를 단절한 채 마치 펜트하우스 2층의 방처럼 보이는 고급스러운 저택에서 운둔하며 살아가고 있다.

욘의 욕망은 과거에 집착을 보이면서도 그의 야망을 채울 수 있는 이상과 현실은 대비된다. 주인공 욘을 중심에 두고 대립되는 가족관계 설정이 더 극적이다. 욘의 아내 귀닐 보르크만(이주영 분)은 몰락한 가문을 아들 엘하르트 보르크만(이승우 분)을 통해 집, 명성, 평판과 가문의 영광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해 집착을 보인다. 아들은 이혼녀이자 7살 연상인 빌톤부인( 최나라 분)과 결혼을 약속한 후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떠나게 된다. 마치 성공의 욕망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엄친아'가 '엄친맘'으로 부터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처럼 말이다. 극이 이정도의 캐릭터와 관계 설정으로는 극적인 효과를 기대 할 수 없다. 중요한 인물 포인트는 엘라 렌트하임(정아미 분)과 자매인 귀닐, 욘과의 관계 구도가 극적으로 꼬이기 시작하면서 대립구도는 내면화 되어 있는 갈등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엘라의 동생인 귀닐은 욘과 결혼한 후 엘하르트를 낳았고 엘라는 욘과의 과거 사랑을 잊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욘의 사업실패로 살 곳이 없어진 엘하르트를 15살까지 기르게 되면서 이모이자 양모가 되어버린 엘라는 엘하르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전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 할 정도로 집착을 보이는 인물이다. 욘과 귀닐이 살고 있는 2층의 대저택도 엘라의 소유이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자매의 특별한 사랑의 관계도, 이들의 대화도 드라마틱하지만 통속극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연극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욘, 몰락한 가문의 영광을 아들을 통해 돠찾고자 희망의 집착을 보이는 귀닐, 조카를 친아들로 사로 잡혀 있는 엘라, 이혼한 아픔과 생모를 알 수 없는 출생의 가족사가 있는 빌톤 부인, 연상녀 이지만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며 결혼을 결심한 후 새로운 희망과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엘하르트, 그리고 욘이 은둔하고 있는 2층 방으로 간혹 찾아오는 빌헬름 (김신기 분)은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망상가로 유일한 딸 프라다(엄예지 분)는 피아노에 재능을 보이며 3막에서 음악공부를 위해 새로운 세계로 빌톤 부인과 엘하르트와 함께 떠나는 것으로 처리된다. 극중 인물들의 공통점은 각자의 욕망들이 분열되어 있고 사랑이 부재해 있다는 점이다. 사랑이 결핍되어 있어 외롭고 고독함으로 고립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각자의 아픔으로 채워져 있다. 허상의 욕망으로 과거에 집착해 인생을 개척하려는 욘은 현실에서 몰락할 수밖에 없는 구시대의 망상가에 지나지 않는다.

고선웅 연출의 연극 '욘'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고선웅 연출의 연극 '욘'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 고독한 허기로 채워지는 허상의 욕망

무대는 3막까지 현실풍경을 재현하는 집 구조에서 4막에 이르며 설산의 전경으로 전환된다. 눈으로 덮인 설산은 흰 백색으로 형체가 사라져 있고 욘, 엘라, 귀닐은 욘의 발자국을 따라 눈보라 치는 산 정상에 올라도 보이는 것은 허상의 욕망뿐이다. 욘이 엘하르트를 떠나보내고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사랑'이다. 4막 후반에 심연을 울리는 욘의 대사가 들린다."사랑해! 깊은 어둠에 싸여 죽음의 황홀경에 누워있는 너희들을 사랑해 너희들과 삶을 추구하는 너희들의 보물들, 그리고 권력과 영광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너희들의 모든 하인들을! 사랑해, 사랑해!" 고독한 허기로 채우고 싶었던 깨달음으로 돌아온 것은 가슴을 부여잡고 동상처럼 죽어간 욘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벚꽃동산에서 죽어간 늙은 하인 피로스처럼, 욘의 죽음은 막대한 자본가로 부와 권력, 명예를 쥐고 한 시대를 개척한 뒤에도 부패로 몰락한 가문은 청산되어야 할 구시대인 것이다.

무대는 증기선의 경적소리가 들려오고 새 시대는 엘라와 귀닐도 과거갈등을 털어내고 미래로 향할 수 있는 희망의 경적이다. 귀닐은 "이제 우리 손을 잡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대사로 그림자처럼 살아온 언니 엘라를 향해 화해의 손을 내민다. 설산의 전경에서 연극적인 구도로 입센의 <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희곡에 마침표를 찍는 고선웅표 4막의 미장센은 욘의 죽음 처리도 극적 이였지만, 배우 이남희의 '사랑해' 라는 대사의 멜로디는 욘의 마지막 유언처럼 감동적이다. 한 가지를 더한다면 극중 인물들의 분열된 욕망과 욘의 고립된 행동들을 표면화하기 위해 1,2층의 극중 인물들 행동들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도록 욘, 귀닐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분리되면서도 동일 공간구조로 포개놓은 연출 설정이 욘의 가족사를 은유적 공간으로 드러내고 있다. 시공간의 변화를 단일 공간으로 구조화 한 것이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를 안정감 있게 뒷받침하며 3막까지 극을 끌고 갈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작품은 극중 인물을 녹여내는 이남희, 정아미, 이주영, 김신기, 이승우, 최나라, 정원조, 엄예지 등 배우들 캐스팅과 연기의 앙상블이 작품을 견인하며 성공의 8할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시 극단의 <욘>은 21일(일)요일까지 공연된다. 아프면서도 웃게 만드는 고선웅 식 고전극을 현대적으로 감상 하고 싶다면 추천하는 연극이다. 입센의 욘을 감각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고선웅이기 때문이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