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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의 기록여행] 대구의대생들의 유급을 막아라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7월 27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7월 27일 자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혹독한 일제하에 있어서도 대학교수회의 자치권은 운용되었다. 이 자치권 정상적 활용이 있어야만 민주주의적 교육의 발전과 진실한 민족문화의 건설을 기할 수 있다. 학자나 교육자가 민정관의 전면적 지배를 받고 지위 보전과 출세에만 급급한다면 양심적인 교육활동은 불가능한 것이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7월 27일 자)

학자나 교육자의 양심적인 교육활동이 왜 불가능하다고 했을까. 교육자가 미군정의 지배를 받아 교육자치를 이행하지 못하고 개인의 지위 보전과 출세에 매달린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민주적인 교육과 민족문화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해방 이듬해인 7월 13일 발표한 미군정 당국의 국립 서울대학교 통합안(국대안)에 대한 반박이었다. 국대안은 서울에 있는 경성대학과 7개의 전문학교를 통합하는 안이었다.

교육 당국이 일방적으로 국대안을 발표하자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당국은 부족한 인적자원 활용과 교육의 질적 향상 등을 국대안 강행의 이유로 들었다. 반면에 교수와 학생들은 이 같은 방안은 학원의 관료화를 부추기고 식민지 노예 교육으로 돌아가는 퇴행이라고 반발했다. 조선인이 아닌 미국인이 대학 총장 등을 맡는 것에 특히 거부감이 강했다. 일본이 조선인 학교를 운영하며 조선인을 핍박한 일제 식민지 교육을 떠올렸다.

국대안 반대 투쟁은 교육 현장 곳곳에 널브러진 일제 잔재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해방이 되던 해 11월에 대구의전 학생자치회는 '정숙한 학원건설'을 바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부터 내려오는 폐풍을 없애자는 내용이었다.

폐풍은 입시부정이었다. 실력으로 입학생을 뽑자는 요구였다. 오죽했으면 학생들이 그랬을까. 일제 잔재는 이 같은 입시부정에 그치지 않았다. 교육 정책의 변화에 대한 기대도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옷만 바꿔 입고 자리를 차지한 친일 교육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탓이다.

국대안에 대한 반발은 이처럼 교육에 대한 총체적 불신의 대가였다. 반대 투쟁은 순식간에 들불이 되어 전국으로 번졌다. 반대 시위는 해를 넘겨도 좀체 수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교육 당국은 문제해결보다 퇴학 처분 등의 강경책을 휘둘렀다. 이에 뒤질세라 학생들의 반발 또한 거셌다. 대구에서는 사범대와 의과대, 농과대 등 3개 대학이 2월 중순 동맹 휴학(맹휴)에 들어갔다. 경북도는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들을 처벌하겠다고 나섰다. 전교생이 등교하지 않는 학교는 폐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학생 제군! 학생 제군의 금번 행동을 신중히 반성하라.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학교로서는 맹휴를 인정할 수 없다.~본교는 그간 10‧1사건, 서울 국대안 반대 맹휴 등으로 금년도 수업 총 시일은 1개월 반에 불과했다. 본교교수회는 여차한 관점에서 전기 시일에 등교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진급이 1년간 지연될 수밖에 없다는 정론에 도달한 것이다. 학생 제군 학교 명령에 순응하기를 바란다.' (1947년 3월 11일, 대구의과대학 고시)

3월이 되자 대구의 3개 대학은 맹휴를 멈췄다. 대학들은 시험을 치르고 학업 재개를 서둘렀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대구의과대학 등은 2차 맹휴를 벌였다. 수업일수가 부족했던 의과대학으로서는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한해 전에도 대구의 10월 항쟁으로 이미 수업에 차질을 빚은 터였다. 국대안 반대 맹휴로 수업 총일수는 2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바로 등교해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진급이 1년간 늦어지게 되었다. 학교는 고시로 학생들에게 다급한 상황을 알렸다.

국대안 반대는 해방 직후 건국 도상의 흐름과 맞물렸다. 일제 식민지 교육의 청산은 교수와 학생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나아가 민족의 정체성과 교육 자치권 확보라는 학원 민주화 운동의 성격마저 지녔다. 이 때문에 국대안을 무리하게 추진한 문교 당국자의 문책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80년 전 일어난 국대안 반대 맹휴 때 수업을 문제 삼아 대구의과대 학생들에게 등교를 요구한 주체는 교수회였다. 수업일수를 채우지 못한 제자들의 유급을 막으려는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지금의 수업 파행과 비쳐 볼 때 같기도 다르기도 하다.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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