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요일 아침] 보지 않을 권리

권은태 (사)대구문화콘텐츠플랫폼 대표

권은태 (사) 대구문화콘텐츠플랫폼 대표
권은태 (사) 대구문화콘텐츠플랫폼 대표

산 아래 광장이 있었다. 거기에 모여 사람들이 회의를 했다. 길이 만나는 곳에도 광장이 있었다. 거기서 시장을 열고 물건을 사고팔며 소식도 주고받았다. 옛날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그랬다. 서구 사회는 그 후로도 줄곧 광장이 도시의 중심이었다. 그들의 일상이 광장에 있었고 공동체의 결정적 장면 또한 광장에서 연출되었다. 그런데 우린 좀 달랐다. 집집이 마당이 있었던 우리는 거기서 잔치도 하고 춤도 추고 마당에서 놀이도 했다.

그리고 사람과 여론이 모이는 곳, 장터와 길이 있었다. 이를테면 서문 밖 큰장(서문시장)에서 3·8 대구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시작, 2·28 민주운동은 도청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불붙었다. 그러고 보면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중요한 건 장소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이 광장이든 장터이든 거기에 쌓인 시간과 이야기가 그들과 우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공동체의 정체성과 특별함이 생겨났다. 가난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시절, 우리도 광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구의 그들처럼 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처음 만든 것이 5·16광장(현 여의도공원)이었다. 거기서 군(軍) 또는 관(官)이 대규모 행사나 기념식을 주도하고 거행했다. 그렇게 광장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일상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광장의 대표 격인 광화문 광장 또한 일상과 어우러진 공간으로 보긴 어렵다. 그것을 둘러싼 넓디넓은 차도 때문이다. 게다가 100m 높이의 초대형 태극기 게양대와 '꺼지지 않는 불꽃'을 설치하겠다고 하니 일상과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웃고 떠들다가도 광화문 광장에 들어서면 추모의 마음이 솟아오르며 경건해질 테니 말이다. 불과 얼마 전에 생긴 동대구역 광장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단지 그곳을 가로질러 갈 뿐이다. 그게 무엇이든 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바로 옆 백화점으로 들어간다. 군데군데 대구시를 홍보하는 광고판이 붙어 있는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와 고개를 들면 마주하게 되는 텅 빈 공간, 가끔은 그곳이 광장이 아니라 거대한 광고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니 거기에 박정희 동상을 세운다면 효과는 틀림없이 클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눈에 보이는 건 힘이 세다. 그리고 박정희는 더 힘이 세다. 동상이 건립되면 동대구역 광장은 더 엄숙하고 웅장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일상에서 더 멀어질 것이다. 또한 대구의 관문에 자리한 그의 동상은 대구의 상징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구는 '박정희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낙인처럼 찍힐 것이다.

그래서 문제다.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뜻을 모아 공원을 만들 수도, 특정 공간에 기념비를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 그의 동상이 세워지면 기뻐할 사람도 있겠으나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희생당한 피해자와 가족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때, 그로 인해 아플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먼저 기준 삼아야 한다.

그게 문명사회의 기본 준칙이자 또한 인리(人理)이기도 하다. 기차를 타려면 피해 갈 수 없는 곳, 동대구역 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운다는 건 보기 싫은 사람의 '보지 않을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당장, 박정희 동상이 없다고 대구에 올 사람이 망설일 리는 없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있을 수도 있다.

칠레 산티아고의 아르마스 광장에는 스페인 초대 총독 발디비아의 동상과 원주민 마푸체족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론소 라우타의 동상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런던 화이트홀의 거리에는 영국 장군들의 동상과 '용감한 자 중에서 가장 용감한 자', 식민지 네팔의 용병 구르카의 동상이 함께 서 있다.

동대구역 광장도 그렇게 하면 된다. 같은 돈으로 동상을 작게 만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 국채보상운동과 2·28 민주운동의 주역들, 그리고 전태일 열사 동상까지 하나씩 나란히 세우면 된다. 대구는 깊이 들여다보면 다양성과 도전 정신이 가득한 도시다. 집집이 마당에, 그리고 장터와 길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런 대구의 도시 이미지를 박정희라는 한 인물의 이미지에 스스로 가둬 버린다면 그로 인한 손해가 너무 클 것이다. 지금 동대구역 광장에 박정희 동상을 우뚝 세우는 것은 5·16광장을 대구에 다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상은 지금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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