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을 뻗을 때 칼을 잡은 손에 힘을 팍 줘야 합니다."
한눈에 봐도 가느다란 칼이었는데 너무 얕봤다. 직접 쥐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용맹한 척 팔을 뻗었지만 칼자루를 쥔 손의 힘이 달렸는지 가냘픈 칼은 통제되지 못해 공중에서 휘청거리며 방황했다. 철제로 돼 딱딱한 펜싱 트랙 위에 서 있으니 어쩐지 찬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왠지 초라해지고 부끄러웠다. 펜싱 마스크라도 쓰고 있어 다행이다.
취재진을 펜싱의 세계로 안내한 것은 이승용(54) 대구 오성고등학교 펜싱부 감독이다. 2000년 30살의 나이에 오성고 펜싱부에 부임한 이 감독은 올해로 24년 동안 오성고 펜싱부를 이끌고 있다. 지난 1일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낸 '뉴 어펜져스' 구본길, 도경동 선수의 모교가 바로 대구 오성고다. 이 감독이 바로 두 선수를 발탁해 키운 인물이다.
파리올림픽이 한창이던 지난 6일 찾은 대구 오성고의 펜싱 체육관은 프랑스 못지않은 열기로 가득했다. 여름방학 중인데도 대한민국 남자 펜싱을 이끌 꿈나무들이 펜싱복을 갖춰 입고 각자의 시간과 무게를 견디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특별 강습을 위해 찾은 꼬마 두 명도 눈에 보였다. 오성고에 응집된 대구 펜싱의 위상이 흠씬 느껴졌다.
-펜싱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1982년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시작했다. 원래 축구선수가 꿈이었다. 범어국민학교 시절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5명을 제치고 골을 넣었는데 그게 눈에 띄어 축구부에 스카우트 되기도 했다. 축구가 너무 좋아서 축구부로 유명한 대륜이나 청구로 진학을 희망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운동하는 것을 매우 반대했다. 공부하는 척 몰래 축구를 하다가 결국 아버지께 들켰다. 운동선수는 소위 '건달'이 되는 것이라는 편견이 있으셨다. 부모님의 반대로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오성중학교에 배정받아 입학하게 된 거다. 워낙에 공부보다는 몸 쓰는 걸 좋아해서 아쉬운 대로 펜싱부에 들어가게 된 것이 내 펜싱 인생의 시작이었다. 이후 친형의 대학 문제가 해결되니까 아버지도 펜싱하는 것을 승낙해 주시더라.
-그때는 펜싱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전문 코치는커녕 장비도 아주 열악했다. 펜싱 마스크는 발로 밟으면 푹 꺼졌고, 펜싱용 칼은 탄성이 없어서 몇 번 찌르면 부러지기 일쑤였다. 그 정도 퀄리티의 펜싱 칼마저도 비쌌기 때문에 연습할 때는 검도할 때 쓰는 죽도를 사용하기도 했다. 시합에 나가는 날에만 칼을 배급받아 쓸 수 있었는데, 선수들은 경기에서 지는 것보다 비싼 펜싱 칼이 부러지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칼이 부러질까 봐 용기 있게 찌르지를 못하는 거다. 성적이 좋을 수가 없지 않나. 그래도 열심히 했다. 고등학생 시절 아침에 등교하면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서 운동만 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수성교에서 수성못까지 오가며 뛰어다니는 것은 일상이었다.
-전성기는 언제였나.
▶한국체육대학 학생일 시절 출전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였다. 당시 국가대표 5명을 뽑았는데 전국 2등으로 뽑혔다. 종목을 사브르에서 플뢰레로 바꾸고 나서 얻은 결과여서 더 의미가 있었다. 당시 대구 오성고에서 한체대 진학은 내가 최초였다. 노력해서 대학에 진학하고 보니 사브르를 하는 친구들이 많아 이 종목으로는 국가대표를 하기 어려울 것 같더라. 그래서 플뢰레로 바꿨다. 같은 펜싱이라도 종목을 바꾸는 것은 정말 무모하다. 칼을 쥐는 각도, 자세 등 모든 것이 미세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수년간 사브르를 하기 적합한 몸으로 단련했는데 종목을 바꾸는 일은 말하자면 아예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다.
찌르는 것만 하루에 수천 번을 하면서 6개월을 넘게 보냈다. 종목을 정식적으로 바꿔 시합에 나가기 시작한 이후 한 달 만에 4등으로 올랐다. 대학 선배들과 교수님, 코치님들은 내 선택이 무모한 걸 알았을 텐데도 계속 "너는 될 거다"고 말해줬다. 주변에서 된다고 하니 나도 그렇게 믿게 됐고 정말 됐다.
-선수 생활을 하다가 감독이 됐다.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산격중, 경북예고 등에서 여중·여고 펜싱부 코치를 6년간 했다. 선수를 하다가 처음 감독 생활을 하게 된 거라 시행착오가 많았다. 나는 쉽게 잘할 수 있는 것들인데 아이들이 못 따라오더라. 처음에는 답답했다. 돌이켜보니 선수의 입장에서 가르치려고 한 거다. 감독의 마인드로 바꾸니 아이들이 메달을 따기 시작했다. 감독의 역할은 선수 개개인의 역량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특히 역량이 떨어지는 아이들에 집중해서 기량을 끌어올릴 수 있게 이끄는 것이 선생이고 감독이다. 나는 잘하는 애들은 크게 신경 안 쓴다.
-그러다 2000년에 오성고 펜싱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처음에는 4명밖에 없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 국가대표였던 오은석 선수도 있었다. 장비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지원이 거의 없었다. 지원을 요구하기도 힘들었던 것이, 학교 펜싱부 성적이 처참했다. 장학과장님께 메달 따면 지원을 해 달라고 했다. 부임 1년 만에 동메달이라는 성적을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4월 중고등학교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전국체전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좋은 성적을 내니 교육청에 당당히 지원을 요구할 수 있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것이 스포츠다. 여중·여고에서 가르쳐서 이겨본 경험과 오성고에서 발령을 내준 것에 대한 보답이 더해져 열의를 갖고 성적을 내는 데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은석 선수부터 구본길, 도경동 선수까지 출중한 선수를 배출한 비결이 뭔가.
▶시간이 날 때마다 축구하는 오성중 학생들을 유심히 본다. 펜싱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학생들을 수첩에 적는다. 구본길 선수도 그렇게 스카우트 된 학생 중 하나였다. 발탁 기준은 우선 신체 조건이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어야 유리하다. 다음은 까무잡잡해야 한다. 그런 학생들은 십중팔구 실내에 가만히 앉아 공부하면서 하루를 보내기보다는 바깥에서 뛰어다니는 시간이 더 많은 활동적인 인물이다. 마음에 드는 학생이 있으면 부모님과도 직접 만나 설득한다. 그리고 내가 직접 가르친다. 하나부터 열까지 개인 레슨을 받은 학생 중에 못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고 자부한다.
선수로서 운동을 시작하면 그 어떤 테크닉보다도 늘 기본을 강조하는데 그중에서도 '예의범절'이 가장 중요하다. 바른 몸과 정신, 청결한 주변 환경이 운동에 임하는 마음가짐 자체를 달라지게 한다. 궁극적으로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가치를 강조하는 감독으로서도 아이들 앞에서 솔선수범하려고 노력한다.
학교와 대구시교육청의 전폭적인 지원도 비결 중 하나다. 특히 시교육청 지원이 99%다. 칼 한 자루에 20만원인데 못해도 50자루가 필요하다. 마스크나 자켓도 40~50만원을 호가한다. 쓰면 부러지고 해지기 때문에 1년마다 바꿔줘야 한다. 펜싱 체육관도 있다. 펜싱 트랙은 1천만원이 훌쩍 넘는다. 이런 체육관 하나를 아예 펜싱부 전용으로 쓰는 것은 오성고의 모든 구성원과 시 교육청의 배려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파리올림픽 다음은 LA 올림픽이다. 눈여겨보는 유망주가 있나.
▶오상욱 선수는 무리 없이 다음 올림픽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또 성현모 선수도 기대된다. 왼손잡이에 경기 센스가 타고났다. 오성고의 경우에는 1학년 이수현, 2학년 이찬서, 3학년 김지안을 감독으로서 눈여겨 보고 있다. 특히 이수현 선수는 왼손잡이에 키가 190㎝가 넘고 발도 300㎜다. 그 친구한테는 늘 "오상욱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말한다. 위 세 사람은 사브르 종목이고, 플뢰레의 경우 3학년 권현욱도 유망주다.
-올림픽의 막이 곧 내린다. 짧은 올림픽 기간 동안 한국인의 피를 들끓게 했던 종목을 곱씹어보니 단번에 남자 펜싱이 오른다. 앞으로도 국제대회 등에서 한국 펜싱이 입지를 공고히 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
▶대기업의 투자와 지도자 연수,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한다. SK텔레콤이 2003년 대한펜싱협회 회장사를 맡은 뒤부터 매해 그랑프리 대회를 개최하며 한국 펜싱의 '산실'(産室) 역할을 했다. 지난 20여 년간 엘리트 선수를 지원하기도 했다. 지금 국제대회에서의 한국 펜싱의 성과는 그러한 투자에서 나왔다. 다른 쪽으로는 선진 기술을 배운 지도자가 많이 배출돼야 한다. 지금 당장 메달을 따는 것에 너무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지도자들이 프랑스 같은 펜싱 강국에서 전문 지식을 배워서 꿈나무들을 더욱 전문적으로 양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기적 차원에서 필요하다.
댓글 많은 뉴스
[기고] 박정희대통령 동상건립 논란 유감…우상화냐 정상화냐
이재명의 추석은?…두 아들과 고향 찾아 "경치와 꽃내음 여전해"
홍준표 "김건희, 지금 나올 때 아냐…국민 더 힘들게 할 수도"
정청래, 다친 손 공개하며 "무정부 상태…내 몸 내가 지켜야"
조국, 대선 출마 질문에 "아직 일러…이재명 비해 능력 모자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