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어두운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안 중의 하나가 간도특설대다. 간도특설대는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조직한 만주군 소속 부대였다. 그런데 만주에서 활동했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항일 무장 독립군을 토벌한 부대라 하여 이 부대에 소속됐던 한국인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백선엽 장군이다. 과연 이런 주장들은 어느 정도나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에 근거한 것일까?
1939년 정식 발족된 간도특설대는 옌지(延吉) 부근인 안투현(安圖縣) 명월진(明月鎭)에 본부를 설치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젊은 장군의 한국전쟁』에 의하면 대대급이었던 간도특설대의 부대장은 일본인 소교(소령)나 중교(중령)가 담당했고, 중대장은 한국인과 일본인 반반,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원래 이 부대는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이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 민족별 특수부대 편성의 일환으로 창설된 것이다. 한국인 중심의 간도특설대는 소련 영내로 침투하여 교량이나 통신시설 등 주요 목표물을 파괴하는 특수부대(Special Force)였다. 부대 특성상 간도특설대는 강훈련을 거듭하여 사격·총검술·소부대 전투·야간 기동에 뛰어났으며, 하룻밤에 100여 리 주파할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갖추었다. 때문에 만주군에서 사격·총검·검도 경연대회가 열리면 우승을 휩쓸었다고 한다.
◆만주에서 동족상잔의 비극 벌어져
1931년 9월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만주국을 출범시키자 스탈린은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침공하지 않을까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만주 일대를 게릴라전의 바다로 만들어 일본군을 붙들어 매기 위해 중국공산당에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만주에서 빨치산이 준동하자 관동군과 만주군은 8만여 대병력을 동원하여 만주 일대에서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이 무렵 만주 한인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생존을 위해 일본과 만주국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일본에 저항하는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기반을 잡은 한인 유지들은 자의든 타의든 친일 대열에 가담했다.
반면에 중국인 소작으로 연명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한인 농민들은 중국공산당이 "우리에게 협조하면 지주 땅을 몰수하여 무상 분배"를 선동하자 다수가 그들 편에 가담했다. 중국공산당은 만주 거주 한인 농민들을 끌어들여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빨치산을 조직, 관동군·만주군에 저항했다.
토벌대가 빨치산을 쫓는 과정에서 포로를 잡고 보니 대부분이 한인 농민이었다. 중국공산당이 한인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공격하는 상황을 파악한 일본은, 자신들도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그 결과 한인 위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빨치산 토벌에 동원했다.
그 결과 1939년 10월 1일부터 1941년 3월 말까지 만주벌판에서 중국공산당 편에 선 한인 빨치산과, 관동군·만주군 편에 선 간도특설대 간에 동족상잔의 격돌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중국공산당원의 일원이 된 한인을 체포하러 다니고, 다른 쪽에서는 밀고자를 일본의 주구라고 보복했다. 이로써 만주 일대의 한인 공동체는 갈가리 찢어졌다.
중국과 일본이 만주를 놓고 벌이는 싸움에 한인들이 희생 제물로 동원되어 아비규환을 연출했다. 이때부터 만주에서 외세의 조종에 의해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됨으로써 분단의 유전인자가 싹트기 시작한다.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 장군이 지휘한 토벌대는 빨치산 소탕을 마치고 1941년 3월 19일 토벌 승리 축하연을 개최했다. 토벌에 쫓긴 생존 빨치산 500여 명은 소련 영내로 퇴각하면서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은 종료되었다. 이때부터 만주 일대에는 주민을 등쳐먹는 마적 떼나 비적단이 가끔 출몰할 뿐이었다.
간도특설대는 1941년 12월 현재의 허베이성(河北省)·랴오닝성(遼寧省)·내몽골 자치구 교차 지역인 러허성(熱河省)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간도특설대는 팔로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팔로군은 공산당 직할부대인 신4군과 함께 중국 북부지방에서 활동하던 마오쩌둥(毛澤東) 휘하의 군대였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속된 시기는 1943년 2월이다. 이때는 동북항일연군 빨치산 생존자들이 소련 령으로 도주한 후였고, 간도특설대가 러허성으로 이동한 후였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 전투를 벌인 상대는 팔로군이었을 뿐, 조선 독립군이 아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김효순의 『간도특설대』 등 여러 문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했나?
중국공산당 편에 선 한인 빨치산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민족해방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이라고 고상한 용어로 포장했다. 한인 농민이나 공산주의자들이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조국의 독립이나 해방을 위한 투쟁과는 어떤 관련도 없었다.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만주의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은 스탈린이 일본군을 만주에 묶어두기 위해 이용해먹은 꽃놀이패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들이 소속됐던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의 행동강령과 활동목표는 "반만 항일(反滿抗日)을 통해 중화조국을 옹호하고, 동북 실지(東北失地, 즉 만주)를 회복하며, 항일운동을 통해 중국을 구한다(抗日救中國)"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한인 농민과 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 빨치산의 일원으로 관동군·만주군과 싸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화조국을 옹호하고 일본에게 빼앗긴 만주의 회복 및 중국을 구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런 행위를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한 것으로 날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간도특설대가 우리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은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이것이 만주에서 벌어졌던 1930~40년대 항일 무장투쟁의 불편한 진실이다.
또 한 가지 확실히 해둬야 할 명제가 있다. 간도특설대가 친일파 민족반역자라면, 같은 의미에서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은 친중파 민족반역자다. 그렇다면 일본 편에 섰던 간도특설대는 악(惡)의 화신이고, 친중·친소련·친공산주의 노선을 걸은 동북항일연군은 선(善)의 세력이란 공식은 누가, 무엇을 근거로 만들어낸 것일까?
구한말의 세계인 윤치호는 한국인의 특징을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이제 감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간도특설대의 역사적 사실을 봐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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