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재목의 철학이야기] 괴물이 된 정치 건너가기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정치의 소란과 파탄이 그 원인이다. 민생이 권력욕에 처절히 짓밟히고 있다. 정치가 괴물처럼 징그럽게 느껴진다. 잘 아는 소설가는 "이런 더러운 기분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마음 둘 데가 없다고 토로한다.

공자가 태산 근처를 지날 때, 무덤 앞에서 한 부인이 통곡하고 있었다. (…) 부인이 대답했다. "옛날 제 시아버님은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했고, 남편 역시 호랑이에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 아들까지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그런데 왜 이 고장을 떠나지 않는지요?".부인이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자네들, 잘 알아 두게.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다는 것을." 『예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요즘 같은 평화기에 무슨 '가혹한 정치'를 얘기하냐고 하겠으나, 세상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 원래 정치란 경제와 함께 사람을 바깥에서 도와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종교와 문화는 안쪽에서 사람을 돕는 것이다. 이 둘을 잘 섞어가며 나라다운 나라를 잘 만들면 된다. 하지만 국가가 국민에게 베풀어줄 최고의 도움은 간섭, 감시, 통제, 규율이 아니라 자율, 자립, 자치이다.

흔히 권력은 칼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왕 휘두를 거면,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공공과 상생의 세상을 위해, 좋은 인재를 앞세워서 해가야 한다. "제후의 칼은 용기 있는 자로 칼끝을 삼고, 청렴한 자로 칼날을 삼으며, 현명하고 어진 자로 칼등을 삼고…"(『장자』)처럼 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의 칼이 정치 보복으로 되풀이되곤 하니, 다들 인사말로 "입조심, 몸조심 하라"고 한다. 나 같은 사람은 정치와 거리가 멀어 관계 없다 해도, 무조건 조심하란다. 보복은 보복을 부른다. 정치판에는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 게 상식이라니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는 말씀은 『노자』 책에 조용히 감춰두기로 한다.

"허리띠 고리를 훔친 자는 사형을 당하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장자』)는 말이 있다. 한두 명의 차원에서는 '악'이지만, 수백, 수만이 모이면 그 이름이 감쪽같이 지워지거나 심지어 '선'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구역질 나는 정치가 싫어,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그 이름 석 자가 더러워 훈장을 거부하는 이도, 이민을 떠나는 사람도 본다. 이해된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떠나지 말고, 부디 여기서 악과 싸우면서 버텨야 한다. 악한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권력자의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국민 각자가 '공정한 제3자'로서 폭넓은 교양을 쌓아야 한다. 그래야 괴물이 된 권력과 그들의 거짓말에 당당히 맞설 수 있다.

건강한 위장이 모든 음식물을 소화 시킬 수 있듯, "건강한 눈이라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단지 푸른 빛만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병든 눈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맞는 말이다. 깨끗하든 더럽든, 옳든 그르든, 눈앞의 현실이라면 눈 감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마땅하다.

모든 건 결국 바뀌고, 지나간다. 시간의 흐름이란 강물과 같다. 흘러오는 물결이 먼먼 물결 속으로 어느새 사라져 가 버리고, 다시 뒤따라오는 물결마저 그 속으로 파묻혀 가버리고 만다. "꽃은 저마다 열매가 되고/아침은 으레 저녁이 되는 것/이 세상엔 영원이란 있을 수 없다./다만 변화와 사라짐이 있을 뿐."(헤르만 헤세, '낙엽')

가끔 변화와 사라져가는 저쪽에다 나를 맡기는 것, 아니 그편에 서보는 것도 큰 공부다. 카프카는 "당신과 세상의 싸움에서, 세상 편을 들어라"고 했다. '세상 편'이란 저 타자들의 흘러가고 변화하는 바깥 세계 전체를 말한다. '나'란 그 일부분을 가리킨다. '아(我)'라는 글자는 전체에서 부분을 톱질하여 잘라내는 것을 말한다.

고립된 '내'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전체 흐름 편에 서는 일, 그것은 세상 편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 편에 얹혀 가는 것이다. 참다 참다 못해 마시는 물, 버티다 버티다 못해 마감 직전에야 보내는 원고처럼, '어쩔 수 없음'에 올라타서 그 '부득이'한 힘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내가 살아질 때까지/아니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나는 애매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지상에는 나라는 아픈 신발이/아직도 걸어가고 있으면 좋겠다/오래된 실패의 힘으로/그 힘으로"(천양희, '실패의 힘')처럼.

대책이 없을 땐,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으로, 적극적이기보다는 소극적으로 떠밀려서라도 살아갈 일이다. 벼랑 끝에 서면 보이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평범함'의 힘. 그런 안간힘으로 그냥 걸어가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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