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별미라 한들 가까이서 맛볼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특정한 장소에서만 먹을 수 있다면 요리(料理)는 있되 조리(調理)는 없는 것이다. 문학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문학은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에 국한된 게 아니다. 작품을 대상으로 토론을 하는 모임이 있고 또한 그것의 효용과 관련한 커리큘럼을 짜거나 나아가 작중인물의 언행을 차용해 가치관을 보정하거나 일상의 규격을 재편하는 이도 있다.
조리법의 전파로 많은 이들이 요리의 참맛을 즐긴다. 문학도 알음알음으로 건너가면서 경사의 기울기를 낮추고 이윽고는 인생의 참맛을 전한다. 그런고로 문학의 수신처는 전방위가 돼야 한다. 전파방해는 걱정 마시라. 문학은 원래 외지고 어두운 지역에 특화된 안테나를 내장했다. 그리고 문학은 독점이 불가하다. 골목에 퍼지는 파전 냄새처럼 문학의 향훈 또한 딱히 누구의 것이라고 지목할 수 없다.
서구 평리1동 도시재생 현장지원센터가 지역주민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 '들마을 화목독서회'를 개최한다는 공지가 있었다. 8월 26일부터 9월 23일까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진행. 여기까지만 읽으면 익히 봐 왔던 여느 문화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운영 장소가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 단장한 '성광수퍼'(표기법은 '슈퍼'가 맞다)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곳은 폐업한 뒤 오랫동안 빈 점포로 방치됐던 곳이다. 규모가 크지도 않고 주목받는 장소도 아닌 동네 허름한 점포자리를 문화공간으로 바꾸겠다는 발상이 신선하다.
'수퍼'의 이름을 그대로 살려 운영한다는 점도 이채롭다. 허장성세를 지양하겠다는 결의인 듯도 싶고 낙후지역의 외형 개선에 주안점을 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걸 시사하는 대목으로도 읽힌다. 하긴 발상의 전환 없이 점빵을 가게로, 슈퍼로, 마트로, 편의점으로 바꾼다고 라면이 야끼우동이 되는 건 아니다.
금번 프로그램은 현대시, 소설, 시 창작, 이렇게 세 개의 카테고리로 구성돼있으며 총 9회차로 운영된다고 한다. 강사진의 면면도 신뢰가 간다. 이미 검증이 된 좋은 시인 작가로 구성됐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9회차는 너무 짧다는 점이다. 이런저런 고충이 따르겠지만 문화인프라 확충 개념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
아울러 다른 지자체에서도 적극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빈 점포는 많다. 일 년 넘게 비어 있는 곳도 수두룩하다. 그런 공간에 주민들의 지적 허기를 달래 줄 양식을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양식이란 게 당장은 밥솥으로 끓일 수 없다 해도 언젠가는 양질의 보람으로 퍼 담게 되리라 믿는다. "문학은 무용(無用)하기에 유용(有用)하다." 작고한 김현 선생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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