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나면서, 새벽 공기에는 어느덧 가을의 기척이 묻어났다. 천을산 자락을 오르다 보면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매미의 우렁찬 울음 사이로 장닭이 새벽을 깨우는 소리가 겹쳐진다. 모기 기피제를 뿌렸지만, 골전도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하루살이의 앵앵거림도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다. 밤새 부지런한 거미가 쳐 놓은 실타래에 얼굴이 덮여 멈칫할 때도 있지만, 곧 귀뚜라미의 노래가 그 자리를 대신하리라. 계절은, 그렇게 조용히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진료실로 들어서는 아이들 역시 저마다 '작은 세계'를 품고 온다. 인형, 자동차, 공룡, 로봇 등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꾹 안고 들어서는 그 모습은 언제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중에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손바닥만 한 거미, 흑갈색의 '타란툴라'를 데리고 다녔다. 캄보디아에서는 식용으로도 쓰인다는 그 거미는 보기엔 결코 귀엽지 않았지만, 아이에게는 소중한 친구였다.
그 아이는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동이었다.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그 아이가 거미라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거미는 혼자 살아가는 생물이지만, 자신의 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보이지 않는 그 실이 바람을 타고 진동을 전할 때, 거미는 세상 어딘가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를 감지한다. 마치 외롭지만 단절되지 않은 삶, 침묵 속에서도 연결을 이어가는 방식 같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웹(Web)이라는 단어도 거미줄에서 왔다. 웹은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퍼져 있고, 모든 지점이 서로 얽혀 있으며, 작은 진동 하나도 전부 감지된다. 이런 구조는 오늘날 인터넷, 디지털 네트워크, 나아가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거미줄 위에 서서 살아가고 있다.
이어령 선생은 디지털을 '기계의 언어'가 아니라, '감성의 문명'이라 불렀다. 그는 말과 글의 시대에서 이미지와 상징의 시대로, 입과 손으로 표현하던 인간이 이제는 눈과 귀로 느끼고, 화면 위에서 대화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했다. 디지털은 단지 속도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기호로 대화하고 감성으로 반응하는 새로운 문명의 언어였다.
AI에 대해 그는 이렇게 물었다. 기계는 인간을 따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곧장 대답했다. 지능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공감, 은유, 문맥을 읽는 직관이다. 기계는 계산할 수 있지만, 눈빛 속 여백과 침묵 속 상처는 읽지 못한다. 그래서 이어령은 AI를 인간을 대신할 존재가 아니라, 인간다움을 되묻는 거울이라 했다.
그는 또 하나의 언어를 제안했다. '디지로그'라는 말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가 아닌, 그 둘의 융합. 차가운 속도와 따뜻한 손끝이 함께 있어야 하는 삶. 이어령은 그것이 인간다운 미래라고 보았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지만, 손으로 직접 실을 잇는 감각은 여전히 소중하다는 뜻이었다.
진료실에서 부모들이 묻는다. 이제 AI 시대인데, 우리 아이는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존감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실수와 부족함 속에서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아이를 지탱하는 근육이다.
한 엄마는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벌써 영어 학원 다니고, 코딩도 하는데, 우리 아이는 아직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림 그리는 그 손끝, 그 아이만의 줄입니다. 끊지 마세요. 그 줄이 언젠가 세상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어요."
아이들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마음의 줄 하나를 가진다면, 그 줄은 언젠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작은 웹이 될 것이다. 거미를 무서워하던 그 손길이, 언젠가는 세상을 꿰어 잇는 손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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