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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심강우] 산다는 게 저렇듯

심강우 시인

심강우 시인
심강우 시인

비와 낭만을 묶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변주에 따라 혹은 세월의 흐름과 개인의 부침에 따라 낭만은 외로움과 슬픔, 환호작약으로 바뀌었다가 미움과 그리움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결국엔 비와 이야기는 한묶음이 되곤 한다.

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야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떠오르는 비. 그 둘은 서로의 배경이 되므로 친밀할 것 같지만 의외로 소원한 편이다. 대체로 약속을 꺼리는 비는 지우기를 좋아해서 뭘 그리는 덴 젬병이라는 평을 듣는다.

수목들이 제 마음을 각기 다른 향기와 과실로 그려내듯 비도 때와 장소와 대상에 따라 표현기술(表現記述)을 달리한다. 이건 비가 그린 것 중 드물게 좀체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

매지구름이 떠다니더니 마침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라 반가웠다. 큰길이 보일 즈음 빗발이 제법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활짝 펴진 채 인도와 차도의 경계턱에 걸쳐 있었다. 투닥투닥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멀쩡한 우산을 누가 버렸나.

두리번거리다가 측면 골목 초입에 있는 리어카와 그 곁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칠순은 넘은 듯한 노인과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둘은 바닥에 쏟아진 빈 박스를 줍고 있었다. 수습에 동참하고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

여학생은 학원에 가던 길이었다. 시간이 늦어 서둘러 걷다가 둔탁한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노인도 마음이 급해졌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경사진 골목이었다.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박스 더미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여학생의 등에 매달린 가방이 꽤 무거워 보였다. 노인의 진두지휘 아래 박스를 차곡차곡 쟁인 후 단단히 묶었다. 셋 다 젖을 대로 젖은 터라 더 이상 서둘지 않았다.

리어카를 다시 끌 채비를 하는 노인을 보자 그제야 우산이 생각났다. 우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을 우산은 여전히 투닥투닥,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학생에게 우산을 건네며 우산이 박수를 보내더라고 했더니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나랑 생각이 같았던지 여학생이 우산을 노인에게 건넸다. 하지만 노인은 우산을 받을 손이 없을 뿐더러 가는 곳이 멀지 않다며 사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학원에 늦어서 어쩌냐고 했더니 여학생은 모의고사 열 문제 풀 정도의 시간이라고 했다. 남은 문제나 잘 풀면 된다며 또 웃었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여학생이 탄 버스에서 투닥투닥 소리가 났다. 우산이 그랬던 것처럼. 멀어지는 버스를 보며 생각했다. 산다는 게 저렇듯 빗줄기가 채점하는 모의고사 같으면 좋겠다고. 덜 풀어도 칭찬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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