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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이정식] 방 안의 코끼리, 이제는 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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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전 고용노동부장관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장관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장관

'방 안의 코끼리'란 누구나 알지만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을 뜻한다. 좁은 방 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들어와 있는데, 사람들은 눈치만 본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 결국 방 안의 모든 공간을 차지한다. 지금 한국 사회가 그렇다. 우리 앞에는 세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가 있다.

첫째는 인구 절벽이다.합계출산율은 세계 최저수준이고, 2070년이면 생산가능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청년은 일자리·주거 불안에 시달리고, 양육 부담은 개인에게 전가된다. 그런데 정치 논의는 여전히 현금성 지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청년들이 아이를 포기하는 이유는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현재가 고단하고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절망이 가족 단위 비극으로 이어진다. 프랑스는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 육아휴직 실질 보장, 청년 주거 안정으로 출산율을 반등시켰다. 한국도 '양육의 사회화'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둘째는 노동시장의 불평등이다. 같은 일을 해도 원청 정규직은 연봉 7천만 원, 하청 비정규직은 3천만 원을 받는다. 노동자의 40%가 비정규직이지만 헌법상 노동 3권은 여전히 먼 얘기다. 1990년대 스웨덴은 '연대임금정책'을 통해 대기업 노조의 임금 인상 자제를 유도하고, 그 여력을 중소기업·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썼다. 독일은 '동일노동 동일임금법'을 강화해 격차를 줄였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노조법 2·3조 개정, 이른바 '노란봉투법'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권한 강화는 책임과 짝을 이뤄야 한다. 노조는 조합원 울타리를 넘어 미조직·비정규직과 연대해야 하며, 원청은 하청을 단순 비용이 아닌 '동반자'로 대해야 한다. 갑질과 불공정 거래가 사라지고, 도급과 파견은 제도 취지대로 운영되어야 한다. 권한과 책임은 명실상부해야 한다.

셋째는 산업안전의 민낯이다. 매년 2천 명 넘는 노동자가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지만, 기업들은 법망 회피에 급급하다. 그러나 처벌 강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국은 1974년 산업안전보건법을 제정하며 기업의 '안전 의무'를 명문화했고, 이후 50년간 산재 사망률을 80% 줄였다.

핵심은 처벌이 아니라 예방이었다. 안전 투자를 의무화하고, 노동자가 위험 작업을 거부할 권리를 보장했다. 한국도 중대재해처벌법을 처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업의 안전 투자 의무를 구체화하고, 현장 노동자의 참여권을 보장해야 한다. 동시에 노동자와 노조의 권리 강화는 의무와 책임성 강화와 균형을 이뤄야 한다. 실질적인 노사협력과 경영참여로 현장을 바꾸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모두가 침묵한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이유는 세 가지다. 정치권은 표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인구정책은 장기 과제라 임기 내 성과가 없고, 노동개혁은 어느 쪽을 택해도 비난받는다. 기업은 단기 이익에 매몰돼 비정규직 정규화를 비용으로, 안전투자를 부담으로 본다.

노조는 내부 논리에 갇혀 있다. 정규직 노조는 조합원 불이익을 우려해 구조개혁 논의를 피하고, 미조직 노동자 연대에는 소극적이다. 그 결과는 구조적 침묵이다. 모두가 문제를 알지만,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는다.

2020년 네덜란드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불과 2주 만에 노사정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기업은 고용을 유지하고, 노조는 임금동결을 수용했으며, 정부는 임금보조금을 지원했다. 평소 불편한 대화를 나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도 할 수 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형식이 아닌 실질적 대화기구로 바꿔야 한다. 저출산, 이중구조, 안전같은 핵심 의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진짜 사회적 대화의 장'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제 세 가지 실천이 필요하다. 첫째, 인구 TF를 구성해 정부·지자체·기업·노동·시민사회가 함께 '양육의 사회화' 로드맵을 만든다. 둘째, 노동시장 개혁 협의체를 가동해 노조법 보완, 원청 책임 강화, 동일노동 동일임금, 이중구조 개선,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체계 개편을 논의한다. 셋째, 산업안전 거버넌스를 재편해 기업의 안전 투자 의무를 법제화하고, 현장 중심 '안전위원회'에 실질적 권한을 부여한다. 처벌보다 예방, 사후 대응보다 사전 점검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자.

불편한 대화가 돌파구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한국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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