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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의 연극 리뷰] "깽판인 사회에는 혁명이다" 오태영 작, 이우천 연출의 <메멘토 모리> '혁명을 꿈꾸는 연기 九단들의 풍자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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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메멘토 모리. 극단 대학로 극장.
메멘토 모리. 극단 대학로 극장.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 오태영 작가의 신작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드림씨어터, 극단 대학로 극장)은 정치풍자극이다. 평균 연령 80세 이상으로 보이는 노인들이 집단으로 생활하는 양로원이 배경이다. 팔십 대에도 강숙 할머니(전소현 분)와 팔팔한 연애를 즐기는 유부남 할배 김태오(이인철 분)는 양로원의 혁명을 외치고, 박시철(김종칠 분)은 신문 사회면을 즐겨보면서도 "상위 1%를 위한 입법과 국민들을 향해 '개돼지' 발언을 한 사회적 이슈"에 분노하는 팔팔한 실버 시민이다. 극은 초반부터 인물들의 캐릭터를 통해 "이 연극은 정치풍자극입니다"라고 말하듯, 알 만한 정치 소재들을 슬쩍 밀어 넣는다.

양로원 내부 벽은 숨은그림찾기처럼 군부독재를 환기한다. 육군 전투복을 떠올리게 하는 카키(Khaki)색이다. 양로원이 배경이지만, 정치 풍자를 위한 작가의 치밀한 블랙코미디적 위장 전술이다. 〈메멘토 모리〉는 노년의 인물들이 양로원이라는 폐쇄적 공간 안에서도 여전히 '시민으로 살아 있음'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다. 김태오, 박시철, 강숙, 이옥, 미라 등 일흔을 넘긴 인물들은 병과 기억 속에서 양로원 생활을 하면서도 태오의 허세, 강숙의 성적 농담, 시철의 정치 뉴스 중독은 현실을 비튼다. 양로원은 한국 사회 현실의 축소판이자 '한국 사회'의 은유이다.

메멘토 모리. 극단 대학로 극장.
메멘토 모리. 극단 대학로 극장.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 — 깨어 있는 노년의 시민의식

'양로원'이 곧 국가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될 즈음, 작가는 정치풍자극을 위장하기 위한 스토리 전술을 교묘히 바꾼다. 양로원에는 변변한 운동기구도 없고, 음식도 엉망이다. 그곳에 살아가는 노인들을 위한 복지나 처우는 개돼지만도 못한 현실이다. 치매에 걸린 미라(김영인 분) 할매는 보행 보조기에서 잠을 자는 것이 일상이고, 이옥(김용선 분)은 태오가 "혁명!"을 외칠 때마다 젊은 시절 뜨거운 피가 흐르던 여학생회장 같은 캐릭터로 살아난다. 극 초반에는 양로원 생활의 에피소드가 끼워 넣어지고, 할배 · 할매들의 팔팔한 '썸 문화'에 웃음이 터진다. 연출은 정치 풍자성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속도 조절도 섬세하게 몰고간다. 부정부패한 양로원을 상대로 노인들은 집단 항의에 나서고, 꿈쩍하지 않는 양로원을 향해 태오는 외친다. "혁명만이 답이다, 혁명이다!" 노인들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정신으로 말년에 비로소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간다.

양로원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노인들이 향한 곳은 국회의사당이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나라를 위한 처방전"은 다름 아닌 깽판이다. 날짜 택일도 한 수 위다. 현대판 계엄시대를 연상케 하는 그날을 선택했다. 연출은 스크린을 활용해 할매 · 할배들의 이동 경로를마치 구글맵처럼 띄워놓고, 동선을 파악하며 국회의사당을 포위한다. 국회의사당 앞 거리로 보이는 2막의 분위기부터는"폭발물로 전진하는 혁명의 실천"이다. 초반의 위장된 스토리가 정치 풍자로 본격 발화되는 핵심 장면이다. 노인들은 폭발물 예행연습에 들어간다. 육군 군모를 쓰고 복대를 둘러맨 느린 걸음으로 "남들은 걸어서 5분 걸리는 거리가 우리는 30분 걸리니까, 다들 예행연습 똑바로 하자고!" 하며, 육군대장처럼 작전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김종칠 배우의 연기는 웃음으로 총알을 장전하면서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는다. 작전 순서는 이렇다.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면, 치매에 걸린 미라 할매가 먼저 쓰러지고 그 틈을 타 이옥이 현판에 폭탄을 붙인다. 이어 강숙이 폭발물 버튼을 누르고, 마지막으로 태오가 선언문을 읽는 것이 작전의 시나리오다. 예행연습부터 삐걱거린다.

메멘토 모리. 극단 대학로 극장.
메멘토 모리. 극단 대학로 극장.

◇국가를 닮은 양로원, 혁명 시나리오

이 틈이 풍자로 발화되는 웃음의 별미다. 치매 할매(미라)의 보행보조기에 실린 물건이 폭발물로 바뀌는 상황이 벌어진다. 좌충우돌의 소동 속에서, 폭발물을 배에 둘러매고 치마로 위장한 미라 할매는 치매에 걸려 있으면서도 '메멘토 모리'의 남다른 시민 정신을 보여준다. 이 극중장면에서 웃음이 한 번 발사된다. 작전 연습이 얼추 끝나고, 평균 연령 80대의 노인들은 복대를 맨 시철을 선두로 국회의사당으로 진격한다. 그때 머리 위로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고 스크린에는 12·3일 계엄의 그 날이 영상으로 투사된다. 현대판 계엄군의 모습, 날아가는 창문, 그리고 질서 있게 국회로 진입하는 익숙한 뉴스 화면이 겹쳐진다. 결국, 평균 나이 80세 이상의 양로원 노인들이 꿈꾼 '혁명'은 미완으로 끝난다. 한발 앞선 계엄의 꿈도 좌절된다. 여전히 깨어 있는 시민들의 "혁명"만이 지속할 뿐이다.

◇이인철, 김종칠 김용선…. 연기 9단들의 풍자의 리듬

오태영 작, 이우천 연출의 신작 <메멘토 모리> 유쾌한 정치 풍자극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연출과 작가가 한국의 정치문화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예리함도 크지만, 연기 9단의 이인철, 김용선, 김종칠, 김영인, 전소현 배우들의 캐릭터화된 연기가 만들어내는 혁명의 풍자가 노련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애써 드러내 보이려 하지 않는다. 상대 배우의 연기에 툭툭 반응하며, 신호가 오면 감각적으로 받아 한마디 하고, 쉬었다가 달리고, 연기로 패스하고 드리블하며 장면을 몰고 나가는 연기의 호흡이 치밀하고 유연하다. 감정이 밀려올 때 한 박자 쉬어 기다릴 줄 아는 여유와 그 틈에서 발휘되는 연기 9단들의 내공이 상당하다. 특히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온 이인철 배우의 연기와 복대를 매고 작전을 수행하는 김종칠 배우의 연기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메멘토 모리의 정신을 보여준다.

아쉬운 점은, 노인들이 국회의사당으로 진격해 정치 풍자로 확장되는 작위적 설정이 다소 약하다는 점이다. 노인 복지 문제, 국가와 공무원의 부정부패, 갑질, 시민의식, 그리고 12·3 계엄사태 등 정치·사회적 사안을 포위하고 있지만, 설득의 낙하 지점은 느슨하다. 그러나 연기 9단들의 <메멘토 모리>는 오랜만에 신작으로 돌아온 오태영 작가다운 정치풍자극의 위장 전술을 본 셈이다.

메멘토 모리. 극단 대학로 극장.
메멘토 모리. 극단 대학로 극장.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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