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조두진] 프랑스 빵집과 은행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조두진 논설위원
조두진 논설위원

매일신문사 인근에 프랑스 빵·과자를 파는 가게가 있다. 오전 11시에 문을 열고 재료 소진(消盡) 때까지 판매한다고 문에 써 있다. 오전 10시쯤부터 손님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는데,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이상 기다려 빵을 산다. 20, 30대가 대부분이고 간혹 40대도 보인다.

빵집 앞 줄을 보면서 30, 40년 전 월말이면 공과금(公課金)을 내기 위해 은행 앞에 길게 늘어서 있던 줄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짧게는 1시간, 길게는 2시간 이상 기다려서 공과금을 납부했다. 이들이 하필 사람이 몰리는 매월 마지막 날, 몇 시간씩 줄을 서 가며 공과금을 냈던 것은 대부분 공과금을 일찌감치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월말을 넘기면 연체료가 붙으니, 어떻게든 월말에 맞춰 공과금을 내려고 애를 썼다.

빵집 앞 줄과 은행 앞 줄 사이에는 큰 간극(間隙)이 있다. 빵집 앞 줄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한 선택'이라면 은행 앞 줄은 '해야 할 일을 수행하기 위한 임무'였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시간과 돈을 쓸 수 있는 세대와 먹고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던 세대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선배 세대는 종종 "요즘 청년들은 힘든 걸 모른다. 고생을 좀 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음식이나 일을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취업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청년들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반면 청년들은 선배 세대의 사고와 행동을 낡고 볼품없다고 여긴다.

선배는 후배에게 "적당한 직장 찾아서 빨리 취직해라.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나"라고 말하면 안 된다. 선배 세대가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입고 싶은 것을 입지 않고, 잠을 아껴 일하고 또 일한 것은 후배 세대는 그렇게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후배 세대가 누리는 여유와 선택에 자부심(自負心)을 느껴야 한다. 자신들이 그토록 만들고 싶어 했던 나라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후배 세대는 선배 세대를 "세련되지 못하고 볼썽사납다"고 여기면 안 된다. 지금 청년 세대가 누리는 여유(餘裕), 풍요(豐饒), 청결(淸潔)은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다. 청년 세대가 누리는 거의 모든 편리와 여유는 선배 세대가 인내와 고된 노동으로 쌓아 올린 자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강조한다. 가능하면 적게 일하고, 많이 즐기고 노는 삶이 '잘 사는 인생'이라는 청년들도 많다. 좋은 생각이지만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

대한민국은 자원도 원천기술도 부족한 나라다. 더 많이 공부(창조)하고, 더 많이 일하고, 더 좋은 상품을 만들어 하나라도 더 팔아야 잘 살 수 있는 나라다. 공부와 노동은 행복한 삶의 대척점(對蹠點)이 아니며, 우리가 삶에서 몰아내야 할 적(敵)이 아니다. 여가 추구는 좋으나, 여가를 최고로 여기는 것은 위험하다. 실패로 맥 빠질 수 있지만, 무기력에 익숙해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한국은 과거 최빈국(最貧國)이었고, 언제든 가난해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 인류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이점(特異點·singularity)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노동'과 '여유'는 두 바퀴로 굴러가야 한다. 하나만으로는 굴러가지 않는다. 가난은 결코 하늘에서 내리지 않는다. 국민이 나태해지면 가난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마을을 헤집는다. 그런 징후가 대한민국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