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전 세계를 강타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은 에너지 빈국인 대한민국에 생존을 건 과제를 던졌다. 바로 '에너지 기술 자립'이었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위기감 속에 한국전력기술이 탄생했다.
그로부터 50년. 불모지에서 출발해 기술 자립이라는 국가적 사명을 완수한 한국전력기술은 이제 아랍에미리트(UAE)를 넘어 팀코리아의 일원으로 체코원전 수주에 성공하며 세계 원전 시장을 호령하는 글로벌 엔지니어링 기업으로 우뚝 섰다.
창립 50주년을 맞은 한국전력기술은 '기술'을 넘어 '사람'과 '지역'을 향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2015년 경북 김천혁신도시로 본사를 이전한 후 지역 사회와 호흡하며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을 주도하는 '상생 경영'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매일신문은 한국전력기술의 반세기 발자취와 미래 100년 비전을 심층 조명한다.
◆ 맨손으로 일군 '원전 설계의 기적'
한국전력기술의 시작은 미약했다. 출범 당시만 해도 국내 원전 기술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1975년 미국 번즈앤로우와의 합작사로 문을 연 뒤, 1982년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로 재출범하며 본격적인 홀로서기에 나섰다. 고리 1호기 건설 당시 국산화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했고, 설계와 건설의 핵심은 모두 해외 선진 엔지니어링사에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기술 자립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정부의 원전기술 자립 정책에 발맞춰 설계 주도화를 위한 장기 로드맵을 수립하고, 해외 제휴사에 직원을 파견해 기술을 익히며 밤샘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인고의 시간 끝에 1987년 한빛 3·4호기 종합설계 주계약자로 참여하며 국내 최초로 원전 설계를 주도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 이는 발전소 설계와 건설을 우리 손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업 성장을 넘어 국가 에너지 안보의 획기적 전기로 평가받는다.
이후 독자적인 설계 역량을 바탕으로 한국표준원전 OPR1000 개발에 성공했고 울진 3·4호기, 영광 5·6호기 등을 거치며 기술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1990년대에는 발전용량을 기존 1천MW에서 1천400MW로 40% 늘리고 운전 수명도 60년으로 연장한 차세대 원전 'APR1400' 개발에 착수했다. 이 모델은 최대 지진가속도 0.3g까지 견딜 수 있는 내진 설계(리히터 규모 7.0 정도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수준)를 갖추고, 화재나 홍수 등 외부 충격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안전 계통을 물리적으로 구분했다.
APR1400의 우수성은 세계 시장에서 먼저 알아봤다. 2009년 UAE 바라카 원전 4기 건설 사업을 수주하며 한국형 원전 수출의 물꼬를 텄다. 한국전력기술은 APR1400 기반의 설계 엔지니어링을 수행했고, 올해까지 4호기 모두 완공하며 기술력과 안전성을 입증했다.
이러한 성과는 15년 만의 쾌거로 이어졌다. 올해 체코 신규원전 프로젝트에서 유럽 수출형 모델인 APR1000이 최종 노형으로 선정된 것이다. APR1000은 2023년 유럽사업자요건(EUR Rev.E) 인증을 획득하며 유럽 시장 진입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 SMR·수소·AI…미래 100년을 그린다
창립 50주년을 맞은 한국전력기술은 탄소중립과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에 '백년 기업'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차세대 원전, 친환경 에너지, 인공지능 등 3대 축을 중심으로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소형모듈원전(SMR) 분야에서는 독자 모델 '반디(BANDI)'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디는 부유식 SMR로 전력망이 닿지 않는 도서 지역에 청정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솔루션이다. 한국전력기술은 2030년까지 인허가 획득 및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기존 화력발전의 친환경 전환도 서두른다. 노후 석탄화력을 LNG 복합화력으로 전환하고, 수소 혼소 기술 개발에도 집중하고 있다. 300MW급 가스터빈 50% 수소혼소 기술은 실증을 앞두고 있으며, 상용화 시 연간 12만4천t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기대된다. 신재생 분야에서는 100MW급 제주 한림해상풍력 EPC(일괄수주 계약 방식)를 성공적으로 완공하며 기술력을 입증했다.
디지털 혁신을 통한 '지능형 발전소' 구현도 핵심 과제다. 자체 개발한 생성형 AI 모델 '넥사(NEXA)'는 문서 작성, 번역, 기술 분석 등을 지원한다. 또한 시뮬레이션 기반 예측진단 AI 기술로 설비 고장을 사전 예측하고 사고를 예방하며 발전소의 안전성을 높이고 있다.
◆ 협력사엔 '든든한 디딤돌', 지역엔 '따뜻한 이웃'
한국전력기술의 지난 50년이 기술 자립의 역사였다면 앞으로의 50년은 '동반성장'의 역사로 이어진다. 김천 이전 이후 지역 산업 생태계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2019년 공기업 최초로 '상생협력대출'을 도입해 시중 금리보다 낮은 금리로 자금을 지원했고, 15개 협력사로 시작해 올해 7개 기업이 혜택을 받았다. 또 '상생결제제도'를 통해 하도급 대금이 안전하게 지급되도록 돕고 있다. 중소기업의 특허 등록과 공공조달 구매를 지원하고, '중소기업기술마켓'을 운영하며 판로 개척을 지원한다.
지역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한 '안전 지킴이' 활동도 진행했다. 노후 전기설비를 교체하고 화재 감지기를 설치해 김천 평화시장과 황금시장에서 최근 2년간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구내식당 식자재를 지역 농가에서 우선 구매하고, 지역 특산물 직거래 장터를 열며 지역경제에 활력을 더하고 있다. '파워 엔지니어링 스쿨'을 통해 지역 대학생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재능나누미봉사단'으로 아동 지원 활동도 펼치고 있다.
김태균 한국전력기술 사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에너지 안보를 지키는 것은 공기업으로서의 당연한 책무"라며 "앞으로는 기술적 성취를 넘어 지역 사회와 협력사가 함께 성장하는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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