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의 좌우에 떡과 빵이 있다. 밥이 태양이라면 떡은 '지구', 빵은 그 둘레를 도는 '달'인 것 같다. 아무튼, 어느 날 빵이 '달의 서자'로 발탁돼 한 시절 우주의 맨 끝 방에서 갈대처럼 웅숭그렸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빵의 연대기가 프르투갈을 찍고 프랑스와 일본을 만나
'브레드토피아'(Breadtopia)를 그려냈다. 빵이란 용어는 포르투갈어인 '팡'이 일본에서 변형돼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생겼다. 빵은 밀가루와 물을 섞어 발효한 뒤 구워서 만든다. 여기에 달걀·설탕·곡물 등 첨가하는 성분을 달리할 수 있다. 영국은 '브레드'(bread), 프랑스는 '뺑'(pain), 스페인은 '팡'(pan), 독일은 '브로트'(brot). 그리스어 '파'(pa) 또는 라틴어 '파니스'(pani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빵과 비슷한 과자, 차이는 뭘까? 빵은 발효균인 '이스트'가 들어가고 과자는 없다.
◆한국 빵의 시원
2003년 '한국빵·과자문화사'를 집필한 조승환(한국제과협회 초대회장)은 한국 빵의 첫 단추를 1653년 표류하던 하멜이 제주도에 불시착했을 때로 본다. 1885년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빵을 내민다. 지금과는 조금 다른 버전이다. 이들은 밀가루 반죽을 숯불로 구워 먹었다. 부풀어 오른 빵 모양이 소의 고환을 닮았다. 사람들은 이를 '우낭'(牛囊)떡이라 했다. 1902년 러시아 초대공사 베베르의 처형인 독일 여인 손탁이 러시아 공관 옆에 정동구락부를 개설하고 커피와 빵을 내밀었는데 보통 빵은 '면포', 카스텔라는 '설고'라 했다.
1884년 이미 인구 19만 명의 한성에 무려 3천여 명의 청나라 상인, 1천500여 명의 일본 상인이 자리를 잡는다. 한국에 빵이 소개된 건 일본을 통해서였다. 그 빵은 유달리 단맛이 강했다. 달콤한 팥앙금을 넣은 단팥빵, 설탕과 우유로 맛을 낸 카스테라가 대표적이다. 일본인들이 개발한 빵으로 서양에는 없는 종류였다.
1910년 일본의 빵 기술자가 한국에 온다. 1914년에 경복궁에서 '공진회'라는 명칭으로 과자박람회가 열린다. 이때 모두 993점의 각종 과자류가 선보인다. 일본 총독부 조사자료에 따르면 1926년 경성 내 과자점포는 66개 정도인데 한국 업소는 전무했다. 1920년 한국 최초 양과자점인 '메이지야'(明治屋)가 서울 충무로에 등장한다. 물론 중국도 호떡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본의 찹쌀모찌와 단팥빵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일본 군인들의 비상식이 구멍 두 개 뚫린 건빵인데 후에 단팥빵과 함께 한국 군인들이 가장 즐긴 간식이 된다. 과자는 국가별로 달리 불리는데 우리의 전통과자는 '한과', 일본 전통과자는 '화과자'(和菓子), 중국 과자는 '중화과(中華菓子), 그밖의 서양과자는 '양과(洋菓子)로 불린다. 1962년 남한 내 제과업소는 모두 800여개로 집계됐다. 1963년 1월8일 <사>대한빵과자협회가 창립되고 1968년 과자회보가 창간된다. 그리고 1973년에는 서울 신길동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한국제과고등기술학교가 설립된다. 1979년 전국 제과점은 5천811개소로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이 무렵 조선인에게 참 흥미롭게 다가선 빵이 있다. 바로 '소보로'이다. 으깬 닭고기나 돼지고기 등을 양념해 볶은 음식을 뜻하며 소보로빵이 된다. 일명 '곰보빵'. 그리고 중국인이 만든 '공갈빵'도 재밌었다.
◆한국 최고의 제빵왕은 누구일까?
조승화, 신창근, 이봉상, 한정희, 이건배, 박병주, 이홍경 등 쟁쟁한 인물들도 있지만 단연 김충복(1934~1995)을 꼽는다. 초기 제과명장은 그의 제자가 싹쓸이한다. 2000년 1호 제과명장 박찬회 화과자 대표, 권상범 리치몬드제과 회장과 서정웅 코른베르그과자점 대표다. 경북 봉화 출신인 권 명장은 그의 수제자다. 1963년 18세의 나이로 대구에서 상경, 풍년제과에서 기술을 익혔고 그의 소개로 들어간 나폴레옹제과에서 제과점의 꽃인 공장장에 올랐다.
대구를 딛고 서울로 가서 대성한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김영모다. 그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칠곡군 왜관에서 자랐다. 대구고 2학년 때 중퇴하고 대구 시내 최가네 빵집에서 기술을 익혔다. 무과수제과점 등을 거쳐 1982년 지인이 운영하던 강남구 서초동 빵가게를 인수해 김충복처럼 자기 이름을 내건 김영모과자점을 오픈해 훗날 돈방석에 앉게 된다.
전북 군산의 이성당(李姓堂)은 1920년대 일본인이 운영하던 화과자점 '이즈모야'(出雲屋)를 인수해 발전시킨 것이다. 다음 주자는 1934년 천안에서 태어난 학화할머니호두과자(창업자 조귀금·심복순), 5년 뒤 1939년 경주 황남동에서 시작된 '황남빵'(창업자 최영화), 튀김소보로로 유명한 대전 '성심당'은 1956년 탄생한다.
80년대 대구의 빵은 전국 최강이었다. 바로 뉴욕·뉴델·런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90년대의 스텔라베이커리(김호상), 2000년대 전국 첫 케이크 전문점 최가네(최무갑), 폐업 직전의 삼송빵집(박명호)은 '마약빵'으로 전국구에 등극한다. 이후 밀밭베이커리의 멜론빵, 그리고 반월당 고로케, 근대골목단팥빵 등 때문에 대구는 졸지에 '빵지순례의 고장'으로 등극된다.
2009년부터 대구에도 프랑스 유학파 제과전문가(파티셰)가 '디저트카페 시대'를 연다. 2010년에는 달서구 상인동 '오월의 아침'(김상중)과 도원동 '뺑드캄파뉴'(박영태)가 건강빵의 대명사인 천연발효종빵 , 반월당 '행복빵'은 첨가제 없는 쌀빵을 출시한다. 점차 빵집과 커피숍은 '베이커피카페'로 합쳐졌다. 비슬산 오퐁드푸아, 팔공산 헤이마, 칠성동 빌리웍스, 남산동 남산제빵소, 우즈 등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창베카'(창고형 베이커리카페) 시대를 열어 서울이 벤치마킹을 할 정도가 됐다.
2017년은 대구빵이 국제급 브레드시티의 신지평을 여는 해였다. '르배베이커리'의 배재현, '빵장수쉐프 단팥빵'의 박기태, '데일리호스국브라운'의 배재호. 이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미니어처 같은 꿈의 작품 '다크 나이트'가 2017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월드페이스트리컵'에서 주목을 받는다. 현재 대구·경북에는 무려 130여명의 막강파워 제과기능장이 있다. 한때 한강이남 최고의 빵공장 중 하나로 불렸던 '수형당'(秀亨堂)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보자.
◆대구빵의 첫 단추 수형당
광복 전 북성로 미나카이 백화점 옆 이마사카(今阪) 제과점이 대구 제빵 1세대를 배출한다. 대표주자가 영천 출신의 진병수인데 그는 이마사카를 나와 중구 남산동에서 빵 장사를 해서 번 돈을 재투자해 광복 직후 중구 문화동 2번지 교동시장 내에서 수형당을 창업해 공장빵의 신지평을 연다.
수형당은 1946년쯤 등장했다. 1950~60년대만 해도 해태·삼립제과와 어깨를 겨룰 정도였다. 수형당은 대구 제빵산업의 기틀을 잡아준 기업이다. 훗날 뉴욕제과의 이점석, 뉴델제과 최종수, 런던제과 조원길, 지역의 첫 케이크 전문점 최가네케익의 최무갑, 스텔라베이커리 , 풍차베이커리 등 대구의 메이저급 제과점 관계자들 상당수는 수형당의 영향을 받았다. 상호도 대충 만들지 않았다. 자기 이름 중에 '수'자, 동생(형수) 이름 중 '형'자를 합쳐 '수형당'을 만들 정도의 감각을 가졌다. 진 사장은 당시 경영자로선 드물게 신문광고도 적극 활용했다. 수형당은 '등록상표 제12418호, 경상북도 및 대구시지정 분식 빵 제조공장, 빵의 생명은 신선미, 건강제일의 분식빵으로'란 광고문구를 지역 일간지 광고란에 실었다.
처음에는 사업운이 있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군인 세상'이었다. 6·25한국전쟁 직후 대구로 피란 온 육본과 2군사령부 등 각급 군부대가 포진해 있어 식빵과 단팥빵, 건빵 등을 공급하기 쉬웠고 '독점군납' 덕분에 브랜드 파워를 키운다. 심지어 양질의 밀가루도 군이 독차지했다. 물론 그 밀가루는 미국과 UN의 원조품이었다. 군뿐만 아니라 교도소에도 수형당 빵이 들어갔다. 예식장 답례품용 찹쌀떡과 카스텔라까지 개발한다. 사탕보다 더 맛있는 카라멜(마산땅콩캐러멜도 대구 브랜드임)도 만들었고 70년대초엔 동아백화점 식품코너에도 진출한다. 수형당은 빵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건설·전자산업에도 진출한다. 육군본부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육본을 따라서 상경, 서울 삼각지로터리에 서울공장을 짓는다. 68년 9월엔 국내 최고급 식빵 공급 업체로 발돋움한다.
대구시 서구 평리동에 2천여평 넓이의 수형당 제3공장도 설립한다. 수형당의 식구는 한창 때 300여명이 넘었다. 그럴듯한 직장이 별로 없던 시절, 수형당은 대구상고 졸업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어 하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수형당은 80년대로 진입하면서 치명타를 맞고 침몰한다. 70년대 뉴욕, 런던, 뉴델 등 쟁쟁한 제과점들도 수형당의 아성을 마구 뒤흔든다. 세상이 변했고 사람들의 입맛도 변했지만 수형당은 그걸 재빨리 읽지 못한 것이다. '달구벌의 혀'를 즐겁게 해줬던 선장도 86년쯤 타계한다. 이 수형당을 새롭게 부활시킨 브랜드가 바로 근대골목단팥빵을 만든 '홍두병'이다. 수형당 동대구역점을 통해 '대구능금빵'을 론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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