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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급비 모아요, 딸이 돈 필요할까봐"…카카오프렌즈 헬멧 쓴 그 남자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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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립보고서] 낡은 동네, 고립된 사람들
중국으로 떠난 그리운 딸…빈자리 파고든 술과 외로움
'엎친 데 덮친' 사고 이후 집에만…안부 묻는 건 종교인들이 전부

허진호(63·가명) 씨가 딸의 어릴 적 사진을 보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허진호(63·가명) 씨가 딸의 어릴 적 사진을 보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허진호(63·가명) 씨의 손은 두텁고 투박하다. 반평생을 목수로 일한 흔적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거푸집과 내장 인테리어를 만드는 일을 했다. 부서진 가구를 고치고, 삐걱거리는 문짝을 바로잡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진호 씨는 자신의 손으로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깨진 가정과 무너진 관계는 끝내 돌이킬 수 없었다.

진호 씨의 하루는 방 한켠에 걸린 사진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액자 속에는 백일을 막 지난 갓난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다. 지금쯤은 어엿한 아가씨로 자랐을 터이지만, 그의 기억은 그 웃음에 멈춰 서 있다. 20년여 전 이혼한 뒤로 딸을 본 날이 한 손에 꼽는다. 전처는 중국인이었다. 아이는 중국으로 건너가 자랐다.

진호 씨는 이혼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아내가 밤마다 집을 비워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노래방 도우미 일을 했다더군요. 물론 저도 잘한 건 없었어요."

◆죽음 결심하고 매일 폭음…"38만원 내라" 소리에 의지

낯설었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법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차라리 자신을 망치기로 했다. "마누라도, 자식도 없는 삶은 생각도 해본 적 없었거든요." 술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느 날은 죽어버리려고 술을 마셨다. 밥은 손도 대지 않고, 소주만 들이켰다. 잠들고 나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술을 마시고 토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그렇게 20일을 버티다 119에 전화를 걸었다.

깨어나 보니 응급실이었다. "38만원 내고 가세요." 병원 직원의 단호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술 먹고 죽으려던 사람이 돈이 어디 있냐"며 2박3일을 싸웠다. 진호 씨는 결국 돈을 안 내고 퇴원했다. 실랑이를 실컷 벌이고 집으로 가는 길에 결심이 섰다. 살아야겠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살아야겠다.

진호 씨는 술을 끊고 다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여인숙에 살면서 일용직 목수 일을 했다. 그러다 2009년에 주거상향지원 사업에 선정돼 대명9동의 LH매입임대주택인 낡은 빌라에 입주했다. 그렇게 대명동으로 흘러 들어와 16년째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동네에서 지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 "너무 외로워서 인근 공원을 자주 나간 적이 있어요. 혼자 사는 노인들이 정자에 모여 있었는데, 허구한 날 술만 마시고 시비를 걸어와서 보기가 싫더라고요."

어떻게든 살아가려 했지만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2020년 교통사고로 허리에 철심을 세 번 박았다. 노동 능력 상실은 그나마 남아있던 관계마저 단절시켰다. 그는 몇 년간 병원을 갈 때만 빼고는 집에만 있었다.

◆안부 묻는 건 종교인 뿐…오토바이 헬멧에 덕지덕지 붙은 그리움

외로움이 만든 틈을 종교가 파고들었다. 올해 들어 진호 씨는 기독교 계열의 신흥 종교단체를 다니기 시작했다.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걸 알지만, 요즘 그의 꾸준히 안부를 묻는 건 종교인들이 전부다. 일주일에 세 번, 세 시간 정도 모인다. 집회에 가면 하루가 금방 끝나서 좋다. "예배를 하루라도 빠지면 꼭 전화가 와요. 집 앞까지 찾아오기도 하고요. 날 이렇게 챙겨주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특별히 요구하는 것도 없더라고요."

진호 씨는 몇 년 전부터 매달 수급비를 조금씩 저축하고 있다. "혹시나 딸이 연락 와서 돈이 필요하다고 할까 봐요." 진호 씨는 스마트폰을 꺼내 딸의 사진을 보여줬다.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조형물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몇 년 전, 전처와 겨우 연락이 닿았을 때 받은 것이라고 했다.

진호 씨는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말했다. "계속 보니 예뻐 보이더라고." 그는 자신의 오토바이 헬멧을 보여줬다.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시간이 오래 지났는지 색이 바랬다. "이렇게 다니니 주변에서도 '아저씨, 멋지다' 해줍디다." 진호 씨는 잠시 웃음을 짓다가 오토바이에 걸터앉았다. 허리를 다친 뒤부터 오토바이는 그의 다리나 다름없었다. 헬멧을 천천히 눌러쓰고 시동을 걸었다. 가로수 그림자 속으로 진호 씨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알록달록한 헬멧은 가장 마지막까지 보였다.

진호 씨는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탄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진호 씨는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탄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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