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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나의 두발 산책] 골목에 담긴 4色 종교의 역사… 남산100년향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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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동화사 포교당으로 세워진 보현사. 3·1운동 당시 승려들이 이곳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불교의 공간이 항일 저항의 거점이 됐던 역사가 남아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1910년 동화사 포교당으로 세워진 보현사. 3·1운동 당시 승려들이 이곳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불교의 공간이 항일 저항의 거점이 됐던 역사가 남아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반월당역은 언제 와도 소란스럽다. 지하철이 도착할 때마다 쏟아지는 사람들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언제나 동성로, 혹은 백화점에 닿게 된다. 오늘은 다른 곳으로 향해보자. 불교와 천주교, 개신교와 유교가 나란히 숨 쉬고 일제에 맞섰던 저항의 기억과 순교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남산 100년 향수길'이 가까운 곳에 있다.

◆ 태극기 만들던 보현사

스무 개가 넘는 반월당역 출구중에, 1번 출구에서 곧장 보이는 골목으로 발을 들인다. 번화한 역 주변과는 완전히 다른 공기를 마주할 수 있다. 입상 형태의 보현보살 발아래에서 피워 올린 향냄새가 골목을 채우고, 보살에게 고개를 숙이는 신도들로 주변이 어수선하다. 1910년부터 동화사의 포교당으로 자리매김한 보현사의 첫 인상이다.

당시 동화사 주지였던 장활허사는 신도들과 함께 성금을 모아 절을 세웠다. 문을 연 지 9년 뒤인 1919년, 일제에 맞선 3·1운동이 전국으로 번질 즈음, 보현사의 승려들도 침묵하지 않았다.

열 명의 승려는 보현사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완성된 깃발을 품에 안은 이들이 향한 곳은 지금의 염매시장. 승려와 학생들뿐만 아니라, 뜻을 함께한 시민은 2천 명에 이르렀다. 골목과 시장을 가득 메운 목소리는 대한독립만세로 하나가 됐다.

그 대가로 열 명의 승려는 각각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 가운데 세 명은 광복 이후 건국훈장을 받으며, 늦게나마 그 공을 인정받았다. 보현사는 단순한 신앙의 공간이 아니라, 저항의 구심점이었던 셈이다.

절을 뒤로하고 동부교육지원청을 끼고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또 다른 종교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벽면에는 아이들이 손수 그린 그림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성당과 교회의 모습이 투박하게 그려진 가운데, 교회도 성당도 아닌 낯선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바로 '관덕정'이다.

조선시대 무과 시험장이었던 관덕정은 근대 들어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 됐다. 을해·정해·기해·병인박해를 거치며 25명의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했고, 그들의 이름은 지금도 비석에 새겨져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조선시대 무과 시험장이었던 관덕정은 근대 들어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 됐다. 을해·정해·기해·병인박해를 거치며 25명의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했고, 그들의 이름은 지금도 비석에 새겨져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박해 시달린 종교… 대거 순교

관덕정 순교기념관은 본래 조선시대 무과를 치르던 관아였다. 활과 창으로 무인을 가리던 이 공간은, 근대에 이르러 전혀 다른 역할을 맡게 된다. 신앙을 이유로 사람의 생명을 꺾는 처형장이었다.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로 이어진 천주교 박해 속에서 모두 25명의 천주교 신자가 이곳 관덕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이름은 지금도 관덕정 앞 비석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순교자 가운데에는 성인으로 시성된 성 이윤일 요한도 있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신념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목을 베어야 할 망나니에게조차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품속에서 돈을 꺼내 건네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 터이니 받아 요긴하게 쓰게. 다만,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주게"라고 했다.

그의 삶 전반과 최후는 관덕정 내부 스테인드글라스에 기록돼 있다. 햇살이 강할수록, 색유리에 담긴 이야기는 더욱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관람객을 맞이한다.

관덕정은 천주교뿐 아니라 천도교(동학)의 역사에서도 지울 수 없는 장소다. 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사람마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를 설파했다. 그러나 그 사상은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죄가 됐다. 체포된 최제우는 경주에서 경상감영으로 압송돼 옥살이하다, 1864년 3월 10일 관덕정 뜰에서 참형을 당했다.

지금의 관덕정 건물은 1930년대 이후 한차례 철거된 뒤 다시 세워진 것이다. 이후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갖춰졌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와 관련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최제우의 발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관덕정의 옛터에 해당하는 동아백화점과 현대백화점 사이 보행로에는 '최제우 순도비'가 세워져 있다. 달성공원에 남아 있는 최제우 동상 역시, 대구 곳곳에 상징처럼 흩어져 남아 있는 그의 흔적 가운데 하나다.

반월당 골목 안 낡은 한옥 문우관. 지역 문인과 선비들이 모여 유교의 가르침을 닦던 공간으로 영남 선비들의 시 모임이 열리던 중심지였다. 초라해 보이는 외형과 달리, 상덕사비를 품은 이곳에는 대구의 오래된 선비 정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반월당 골목 안 낡은 한옥 문우관. 지역 문인과 선비들이 모여 유교의 가르침을 닦던 공간으로 영남 선비들의 시 모임이 열리던 중심지였다. 초라해 보이는 외형과 달리, 상덕사비를 품은 이곳에는 대구의 오래된 선비 정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낡은 한옥에 깃든 선비 정신

관덕정에서 인쇄소들이 늘어선 골목을 따라 꼬불꼬불 내려오다 보면, 낮게 엎드린 한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인을 돕는다'. 논어의 한 구절에서 이름을 빌린 이곳은 지역 문인들이 유교의 가르침을 갈고 닦던 곳이다. 또 영남 선비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시 모임을 여는 유교의 중심이기도 했다.

지금의 문우관은 세월을 숨기지 않는다. 기둥은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삭았고, 덜컥거리는 잠금장치 하나에 의지한 채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초라해 보이는 풍경이지만, 그 낡음은 오히려 이곳이 견뎌온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일제강점기, 유교를 배우고 전하던 선비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공부할 곳도, 마음을 붙일 공간도 사라진 시대였다. 그 현실을 안타까워한 유학자 채헌식은 문우관의 문을 열었다. 달성군 출신인 그는 과거 시험을 포기하는 좌절을 겪었지만, 끝내 유교의 맥을 잇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상덕사비각'은 또 다른 사연을 품고 있다. 17세기와 18세기, 경상도를 다스렸던 관찰사 이숙과 유척기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직접 세운 비석이다. 대구이사청이 사라진 뒤, 떠돌던 비석이 자리를 잡은 곳이 문우관이었다.

문을 지키는 '진덕문' 현판에는 또 다른 인연이 깃들어 있다. 진골목에서 생을 마친 석재 서병오 선생의 스승, 서경순의 글씨다. 안쪽에 걸린 논어 문장은 서병오의 제자이자 영남서화회장을 지낸 주병환이 남긴 것이다. 문우관은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여러 세대의 손길이 겹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마당 한쪽의 매화나무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이 나무는, 문익점 선생 후손들이 모여 살던 남평문씨본리세거지에서 건너온 백매화의 자손목이다. 봄이 오면 다시 꽃을 피울 이 나무처럼, 문우관의 역사도 손쉽게 끊기지 않을 것이다.

1893년 설립된 대구제일교회. 교육과 의료를 함께 전파하며 지역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했고, 3·1운동 당시에는 교회 밖 거리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친 저항의 공간이기도 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1893년 설립된 대구제일교회. 교육과 의료를 함께 전파하며 지역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했고, 3·1운동 당시에는 교회 밖 거리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친 저항의 공간이기도 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교회 넘어 거리까지… 만세 외친 교회

대구 최초의 교회 역시 반월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붉은 벽돌로 쌓은 외벽과 봉긋하게 솟은 유리창이 골목 사이에서 유독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건물은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지금은 기독교역사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한때 이곳은 대구·경북 기독교의 중심이었다.

1893년 문을 연 대구제일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공간에 머물지 않았다. 신앙과 함께 새로운 지식이 이 골목으로 흘러들었다. 1899년, 지금의 동산의료원인 제중원이 이곳에 세워졌고, 1906년에는 중등교육기관인 계성학교가 뒤를 이었다. 교회는 종교의 중심 기능을 넘어서서, 근대 병원과 학교 설립으로 이어지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3.1운동 참여교회라는 영광스러운 이름도 붙었다. 당시 제일교회 목사인 이만집은 독립선언서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3가지 행동 강령을 읽고, 가장 먼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서문시장에 모인 1천만명의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을 부르짖으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해마다 3월 1일, 교회를 찾으면 그날을 기리는 예배가 이어지는 이유다.

이 골목에는 만세를 외친 승려들이 있었고, 신념을 지키다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글과 사상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선비들이 있었고, 거리 한복판에서 독립을 외친 목회자도 있었다. 서로 다른 믿음과 사상은 이 좁은 공간에서 부딪히고, 겹치고, 이어지며 지금의 대구를 만들어왔다.

다음에 반월당을 지날 때는 출구 번호보다 근처 골목을 먼저 떠올려보자. 무심코 지나친 길 위에는, 여전히 명을 잇고 있는 종교의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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