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산행을 함께 하기로 한 후배에게 출발 이틀 전 심한 감기가 찾아왔다. 전화기 너머 들리는 후배의 목소리는 심각했다. 일정에 차질을 빚을까 병원을 다녀왔다는 그의 말에, 우선 걱정은 내려놓고 푹 쉬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산행을 미룰까 고민도 됐다. '이 상태로 갈 수 있을까. 30㎞ 가까이 걸어야 하는데. 갔다가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 처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진 않았다. 우선 상황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출발 전날 밤, 이 정도면 가도 될 것 같다는 후배의 말에 계획대로 배낭을 꾸렸다.
◆대피소 향한 지독한 오르막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새로운 다짐이나 변화가 필요할 때, 몸을 극한 지점까지 이끄는 능선 종주를 다녀온다. 오로지 순간의 어려움을 견뎌내자는 한 가지 일념으로 몇 시간이고 걷고 나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그때 찾는 3대 능선이 있다.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종주 코스다. 공통점은 모두 30㎞가 넘는 고된 길이란 점이다.
지리산은 노고단부터 천왕봉까지가 주능선으로, 화엄사에서 올라 대원사로 하산하는 46㎞ 코스가 대표적이다. 설악산은 남교리에서 출발해 대청봉에 오른 뒤 공룡능선과 마등령, 비선대로 이어지는 42㎞ 코스가 대표적인 종주길이다. 덕유산은 육십령에서 출발해 남덕유산을 거쳐 주능선을 따라 정상인 향적봉에 오른 뒤 무주구천동으로 내려오는 32㎞ 코스가 일반적이다. 사람들은 이 코스를 '육구종주'라고 부른다.
이번에 택한 코스는 '영구종주'로 불리는 길이다. 영각사에서 출발해 남덕유산에 오른 뒤 주 능선을 걷는 27㎞ 코스다.
오전 9시 후배를 만나 덕유산으로 향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른 점심식사를 한 뒤 영각사 입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첫날 목적지인 삿갓재대피소를 향해 산행을 시작했다.
지금껏 덕유산엔 여러 번 올랐지만 종주는 34년만이었다. 대학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마친 뒤 주말 대학동기 2명과 종주를 했다. 그 땐 이번 코스와는 반대로, 정상인 향적봉에 먼저 오른 뒤 남덕유산에 올랐다.
그 시절 만났던 장쾌한 덕유산 능선을 떠올리며 남덕유산을 향해 묵묵히 걸었다. 남덕유산이 가까워질수록 경사는 가팔라졌고 바람은 거세졌다. 더 자주 쉬었고, 시간은 점점 지체됐다. 목표했던 대피소 도착 시각은 오후 6시 30분. 이러다 오후 7시가 돼도 도착하지 못하겠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간신히 남덕유산에 올랐다. 차갑고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멀리 내일까지 걸어야할 덕유산 주능선을 잠시 눈에 담은 뒤 곧바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부지런히 걸었다. 그럼에도 거리는 좀처럼 줄지 않았고, 날은 조금씩 어두워져갔다. 후배의 컨디션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점심식사 때 남긴 음식이 떠올랐다. 더 먹어둘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각자 배낭에 넣어온 에너지바를 하나씩 꺼내 먹었다. 놀랍게도 후배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에너지바 덕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찌됐건 몸 상태가 훨씬 좋아진 건 분명했다.
해 지는 덕유산은 고요했다. 삿갓봉까지는 해가 지기 전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훨씬 전부터 헤드랜턴을 꺼내야 했다. 삿갓봉에 오른 뒤 눈 쌓인 경사면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스틱 쥔 손에 힘을 꽉 줬다. 잠시 후 아스라한 대피소 불빛이 보였다. '마침내!'라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땅거미 내려앉은 대피소는 포근한 온기로 가득했다.
◆구름 뒤덮인 능선길
맞춰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공기가 귓불을 차갑게 스치고 지나갔다. 취사장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대피소를 나선 시각은 오전 6시. 대피소를 벗어나자 전날보다 더욱 거세진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왼쪽 빰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덕유산 주능선은 남북으로 이어져 있다. 겨울철 이곳엔 강한 북서풍이 부는 것으로 유명하다. 덕유산 종주 길은 대부분 주능선을 기준으로 서쪽, 남덕유산에서 정상으로 진행할 경우 능선 왼편으로 나있다. 앞쪽 왼편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능선 동쪽으로 난 등산로에선 거짓말처럼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하다.
대피소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무룡산에 오르자 날이 조금씩 밝아왔다. 하지만 구름 잔뜩 낀 날씨 탓에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은 볼 수 없었다.
또 다시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매서운 북서풍의 위력을 온몸으로 경험한다. 발음이 제대로 안 될 정도로 입이 얼었다. 수십 분을 걸어도 계속 서쪽 사면이어서 참다못해 욕설이 나올 뻔했다. 후배의 걸음 속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다 돼서야 동엽령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1시간 정도 지체됐다. 이곳엔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긴급재난 안전쉼터가 있다.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을 꺼내 컵라면을 먹으며 추위에 지친 몸을 녹였다.
백암봉을 지날 즈음, 이날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났다. 정상 쪽에서 내려온 그가 인사를 건네며 한 마디 툭 던진다. "얼마 안 남았어요. 힘내세요."
그의 말에 후배와 마주보며 한참을 웃었다. 2년 전 함께 한라산을 올랐던 기억이 떠올랐던 터였다. 하산하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5분만 가면 정상'이라며 힘내라고 했지만, 가도 가도 정상이 나타나지 않았던 기억.
이곳에서 향적봉 아래 중봉까지 이어진 '덕유평전'엔 또다시 칼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날린 눈은 얼굴을 마구 때렸고 마지막 계단길에선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였다.
중봉에 다다를 즈음 뒤를 돌아봤다. 이곳은 겹겹이 이어진 덕유산 주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기대했던 풍경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전부터 날씨 앱을 통해 구름상황을 지켜봤었기에 예상한 일이었지만 못내 아쉬웠다.
중봉을 지나 향적봉으로 가는 길은 완전한 '자연미술관'이었다. 등산로 옆으로 독특한 나무가 줄지어 나타났다. 주목, 구상나무, 고사목 등 모양도, 상태도 가지각색이었다.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은 평일인데도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대부분 덕유산 리조트 곤돌라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다. 곤돌라 종착지인 설천봉에서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따라 20분쯤 올라오면 향적봉에 이를 수 있다. 이들은 정상석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마침내 끝!'이란 생각에선지 지쳐있던 후배 얼굴에서도 짙은 안도감이 묻어났다.
누군가 이야기했다. 종주 산행은 시련과 고통을 안겨주지만, 이를 극복한 뒤 얻는 뿌듯함은 1년을 족히 버티게 한다고. 함께 한 후배에게 첫 덕유산 종주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댓글 많은 뉴스
李대통령 "북한 노동신문 국비 배포?…누가 이런 가짜뉴스를"
단식하는 張에 "숨지면 좋고"…김형주 전 의원 '극언' 논란
李대통령 "이혜훈, '보좌관 갑질'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아나"
경찰 출석 강선우 "원칙 지키는 삶 살아와…성실히 조사 임할 것"
유승민, '단식 6일차' 장동혁 찾아 "보수 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