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소통의 부재가 불신을 낳고, 그 불신이 광기를 부추기며 극단적인 사회 현상으로 번져가는 시대다. 이웃 층간 문제로 인한 살인과 갈등, 자기혐오로 인한 광기, 취준생들의 극단적인 선택과 경제적 불평등, 청년들의 비혼 문화, 청년 실업과 형제 간 유산 다툼, 치매 부모를 가해한 뉴스는 넘쳐나고 있다. 프로젝트 아일랜드는 이러한 현상들을 자체 역량강화 창작 프로그램으로 소재화해 8~10분 이내의 12개 옴니버스를 단원들이 직접 서사화한 공연〈벽이 서 있다〉(연출 서지혜, 공유소극장)를 무대에 올렸다. 역량강화 작품임에도 서지혜 연출이 공유소극장 조건을 활용해 무대화한 완성도는 상당하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구성된 배우들의 연기는 무대에서 생존성을 드러낼 만큼 날것의 감각성을 보여준다.
특별한 점은 두 평 크기의 원룸을 사실적으로 배치하고, 원룸의 내·외부를 회전 무대화해 파편적인 에피소드들을 '나와 벽', '나와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벽', 그리고 내면에 보이지 않는 벽들 사이로 균열돼 있는 인간과 사회 현상으로 연결해 하나의 서사로 진입시키는 방식이다. 장면의 속도감과 배치, 조명과 구도, 배우들의 움직임과 동선, 조명의 공간성이 집약되며 각 에피소드가 '공간으로 정교하게 구도화 된 장면'으로 형상화된 점이 그렇다. 에피소드를 100분 동안 정교하게 교직(交織)해 가는 연출 감각을 보면, 작품은 프로젝트 아일랜드의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넘어 극단의 작품 개발 역량과 서지혜 연출의 감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공연이라 할 수 있다. 〈벽이 서 있다〉의 12개 에피소드가 향하는 방향은 공감과 배려, 나와 타인, 사회에 막혀 혈전(血栓)된 벽들에 관한 존재와 소통 방식의 이야기다.
◇ '벽'이라는 키워드로 묶은 소통의 방식
관객들은 부재와 균열로 생겨난 벽 사이에서 청년들이 겪고 바라보는 사회의 현상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무대는 2평 남짓한 원룸이다. 세트화한 원룸은 소극장의 자연 벽면과 환경 속에 배치될 만큼 사실적이고, 빛과 각도를 활용한 섬세한 조명 디자인은 영화 촬영장처럼 원룸의 공간과 사물들이 미세한 빛의 구도 속에서 살아 있도록 부각시킨다. 첫 에피소드〈시취〉(屍臭, 이지훈 작 / 청년 역·이지훈 / 집주인 아들 역·김안우)는 사회 초년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경제적 벽에 갇혀 살아가는 이야기다. 방바닥에서 시체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원룸인데도 몇만 원 월세를 아끼기 위한 집주인 아들과의 건조한 대화는 건물주 아래 인간이 살아가는 자본의 비만함도, 청년 주거 정책도 사회 초년생을 냉소적으로 대하는 아들 캐릭터로 풍자되지만 '88만 원 세대'의 삶은 희망의 생존이라기보다 하우스 푸어로 연명하는 현실에 가깝고, 이들이 향하는 미래는 지워낼 수 없는 죽은 자의 시취 자국처럼 희망이 전소되어 가는 N포세대의 내면들이다.
<시취>는 원룸에서 죽어간 치매 노모의 몇천만 원 현금 유산을 찾으러 온 형제 이야기 〈유산〉(박해일 작/형 역·서정균/동생 역·박해일/집주인 아들 역·김안우)로 이어지고〈누수〉(서정균 작/윗집 여자 역·이영현/아랫집 남자(청년) 역·이지훈)는 층간소음과 이웃 간 누수 갈등을 다루면서도 혼자 사는 여성의 캐릭터를 통해 데이트 폭력이라는 사회 문제로 까지 서사를 좁혀 들어간다. 누수로 은유되는 층간·이웃의 갈등은 연애와 결혼, 자기 집 마련을 포기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청년 정책 현실과 경제 구조, 취업난의 양극화, 수도권으로 과밀화된 균형 발전의 문제들이 동시에 '새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중소기업 취업 합격을 두고 두 친구 사이에 희비가 갈리는〈내가 아니고〉(김안우 작/박민수 역·박해일/임민수 역·임경훈)는 대한민국 취준생들의 비참한 생존기를 그대로 드러낸다. 지원한 기업체의 합격을 기다리는 한 사람, 그리고 친구에게서 비법을 전수받아 같은 기업에 원서를 낸 또 한 사람. 두 사람은 합격 운명이 갈리면서 질투와 생존 욕망이 시기심으로 점화되고, 둘 사이의 벽은 균열이 아니라 몸싸움으로 뒤엉킨 난장판의 심리적 파열로 치닫으며 청년 세대가 마주한 취업의 현실과 구조적 한계를 타격한다. 아내와의 소통 부재로 인해 매주 금요일마다 분리수거를 해야만 하는 남자의 이야기인〈금요일〉(최승언 작/남자1(음식 쓰레기 버린 남자) 역·최승언/남자2(캐리어 버린 남자) 역·서정균)는 아내 잔소리에 분노해 살해한 뒤 시신을 캐리어에 담아 유기한 사건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누적된 분노와 단절이 일상의 규범을 벗어나 극단적 폭력으로 전이되는 한국 사회의 불안한 단면을 드러낸다.
자기혐오로 인해 스스로 벽을 쌓고 살아가는 여자의 이야기 〈쓸모1〉(최승언 작/ 여자 역·김나현/인터폰 출연·배달원 역·최승언/옆집 남자(청년) 역·이지훈)은 셀프로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하는 장면을 원룸 내부로 생중계하듯 구성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스스로 차단한 채 온라인 플랫폼 안에서만 존재를 확인하려는 청년 세대의 고립과 자기소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카메라는 소통의 창구처럼 작동하지만 누군가와의 관계를 대체하는 장치로 기능 된다. 청년들이 처한 불안정한 사회 구조 속에서 자기혐오가 어떻게 디지털 이미지로 증폭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 구성은 에피소드 배열의 밀도를 한 단계 끌어올리며 중반부의 분위기와 에피소드 리듬을 전환시키는 연출적 장치로 작동되는 섬세함이 좋다.
이어지는〈쓸모2〉(여자 역·김나현/남자(택배원) 역·서정균/경비원 역·임경훈)는 생리 현상이라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계기로 불쑥 침입한 택배기사 에피소드를 통해 서사를 확장하고 이를 판타지 소설가의 이야기로 변주한다. 글쓰기를 포기하려는 순간 무심코 던진 "팬입니다"라는 택배기사의 한마디는 자신과 타인 사이에 견고하게 세워졌던 벽을 허무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장면은 타인을 향한 공감의 언어가 고립된 개인을 사회로 연결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결국 벽을 제거할 수 있는 답안지는 '소통과 공감, 배려'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제시한다.
◇ 공감과 배려의 부재, 나를 마주하는 벽면들
<경적〉(이영현 작/오빠 역·박해일/동생 역·전채희)은 아파트라는 집합 주거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울리는 경적 소리를 고립과 공동체 붕괴를 드러내는 사회적 신호로 확장시킨다. 개인의 이동과 편의를 위해 부착된 경적은 때로 이웃에게는 소음이 되고, 분노와 불신을 축적시키는 갈등의 언어로 기능한다. 그러나 <경적〉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은 단순한 생활 불편을 넘어, 타인의 죽음 앞에서도 무감각해진 사회적 감각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경적 소리가 한 남자가 심장마비로 죽어가고 있다는 신호임을 인지하게 될 즈음, 박해일의 대사인 "미쳐버리겠네… 아무나 내려가 주세요… 아, 개새끼야. 잠 좀 자자!"는 욕설과 구조 요청이 뒤엉킨 채 터져 나오며 공동체의 균열과 사회적 안전 시스템의 붕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중년 남성들의 심장마비 죽음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호출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경적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과로와 스트레스, 돌봄의 사각지대 속에서 방치된 마지막 신호처럼 울린다.〈경적〉은 공간의 미장센이 특히 돋보이는 장면이다. 시각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연출에게 주어진 것은 원룸 구조의 내부 공간과 빨간 벽돌로 이루어진 외부 구조라는 제한된 조건이다. 서지혜 연출은 이 두 공간을 서사의 동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무대 구조를 회전시키는 방식을 택했는데,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에피소드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장면들은 점차 극적인 단일 서사로 응집된다. 특히 중년 남성의 죽음은 마지막 에피소드인〈첫 번째 조문객〉과 연결되며 사회적 서사로 확장시키는 연출적 구도를 보여준다.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서로의 집에 거미줄 인형을 놓고 주술을 걸어 죽음을 저주하는 〈거미줄〉(임경훈 작/집주인 아들 역·김안우/영석 역·최승언/ 헌터 역·이영현/경비원 역·임경훈)은 갑과 을의 벽이 서로를 응징에 가깝게 가해하는 방식으로 구축되는 장면이다. 여기서는 영화〈파묘〉속 무당 화림의 신들린 굿판을 오마주한 듯한 장면이 삽입되며 극 중 장면 전체의 리듬을 웹툰의 전경처럼 이질적 에너지로 전환한다. 언어장애를 앓는 딸과 일반 학교에 보내려는 엄마가 전학을 두고 대치하는 〈닿지 않는 말〉(전채희 작/엄마 역·김나현/ 딸 역·전채희)은 딸로 분한 전채희의 수어와 파열된 음성 연기가 매우 사실적이다. 동시에 '닿지 않는 말'은 〈벽이 서 있다〉 12개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여전히 가로막힌 벽면에 닿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실의 전경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비혼식〉(김나현 작/ 윤섭 역·임경훈/지현 역·김도원)은 경제적 불안정이 비혼을 청년 세대의 문화로 고착시킨 현실을 보여주고,〈첫 번째 조문객〉(딸(지현) 역·김도원 / 아버지 역·남동진·김성태(카메오 출연)/장례지도사 역·김안우/옆 분향실 상주들 역·서정균·박해일)은 15년간 벽을 쌓고 살아온 부녀의 이야기로 에필로그 에피소드로 배치된다. 원룸의 공간은 장례식장이 되고, 아버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장례식장에 들어온 딸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엄마 이야기, 부녀 사이에 묻혀 있던 과거의 가족사를 하나씩 들춰낸다. 관객은 "엄마의 죽음"을 중심으로 첫 번째 조문객이 된 딸의 방문을 따라가게 되지만, 상조회사 직원이 들고 온 영정사진이 아버지임을 눈치채는 순간 이야기는 반전으로 뒤집힌다. 결국 '첫 번째 조문객'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처음 방문객이 된 딸이 15년간의 벽을 죽은 아버지와의 마음속 대화로 마주하는 서사다. 영정사진이라는 장치로 아버지의 죽음을 반전으로 처리한 에피소드 배치도 좋았지만,〈시취〉–〈유산〉–〈첫 번째 조문객〉을 묶어 연결하고 다른 에피소드를 마지막으로 배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의미는 선명하지만 무거움이 앞에 배치된 우수한 에피소드들이 가진 힘을 '전소'시키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12개의 에피소드를 단원들의 경험적·관찰적 옴니버스 서사로 구성했다는 점과 배우들의 감각적인 유연성은 분명한 장점이다. 무엇보다 이 파편들을 '벽'이라는 키워드로 단단하게 묶어내며, 내면의 균열과 사회적 불신의 풍경을 한 공간 안에 밀도 있게 교직(交織)해낸 연출의 방식은 프로젝트 아일랜드의 역량강화 작품을 넘어선 성과다. 결국 벽을 제거하는 방법은 타인을 향한 공감과 배려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존중하는 내면에 있지 않을까. 고인이 되신 영화배우 안성기 선생이 평소 아들에게 했다는 "착해야 한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벽이 서 있다〉의 12개 에피소드는 불편하지만, 이 시대 청년 단원들이 마주하고 바라본 사회적 현상들이다. 작품의 완성도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단원들의 역량강화 작품을 위해 프로젝트 아일랜드 선배 배우들이 총출동해 조명과 카메라를 잡고, 매표소를 책임지며 연기 지도를 병행해 공연을 준비한 남동진, 최무인, 김성태, 정선미 등이 있어 프로젝트 아일랜드의 작품적 역량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댓글 많은 뉴스
국민의힘 최고위, 한동훈 전 대표 '제명' 확정
한동훈 "국민의힘, 북한수령론·나치즘…정상 아니야"
친한계, '한동훈 제명'에 오후 1시20분 기자회견…입장 발표할듯
李대통령 "담배처럼 '설탕 부담금'은 어떤가" 제안
국힘 친한계 의원 16명, 한동훈 제명에 '지도부 총사퇴' 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