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휴민트' 시사회를 다녀왔다. 제작 단계에서 남북한 정보기관의 기본 구도, 북한의 외화벌이와 마약 실태, 러시아를 축으로 하는 국제범죄 조직 등에 대해 자문했던 인연으로 초청받았다. 영화 시작 전 제작진과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건네는 풍경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은 건 영화가 던진 질문이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안보 현실 위에 서 있으며, 그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가.
'휴민트'는 이 영화 감독인 류승완이 메가폰을 잡았던 첩보 영화 '베를린'과 유사한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훨씬 더 빠른 전개와 높은 액션 밀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건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 여전히 냉전의 유산을 벗어나지 못한 한반도의 구조적 조건을 전면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남북이 군사적 대치와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안보 상황, 체제 유지를 위해 자국민을 벌목공·접대원 등 외화벌이로 내모는 북한의 비참한 현실, 탈냉전 이후 다극화된 국제질서 속에서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부상한 국제범죄 조직의 실체가 영화의 배경을 이룬다.
영화는 또한 일반 대중에게 여전히 낯선 '첩보 공작'의 세계를 휴민트(HUMINT)라는 개념을 통해 소환한다. 정보기관의 역할, 정보요원이 감내해야 하는 위험과 고립, 그리고 국가안보라는 추상적 가치 뒤에 가려진 개인의 삶과 희생을 비교적 설득력 있게 담아낸다. 이것 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첩보 활동은 크게 인적정보인 휴민트와 테킨트(TEKINT, 기술정보)로 구성된다. 과거 정보전의 중심은 휴민트였으나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감청, 위성, 사이버 정보 등 테킨트의 비중은 대폭 확대되었다. 오늘날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인식이 확산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정보의 세계에서 이 믿음은 언제나 절반만 맞다.
결국 정보는 사람으로 완성된다. 기술이 포착한 단서를 확인하고 해석해서 맥락을 부여하며, 이를 실제 작전과 정책으로 연결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테킨트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마지막 판단과 실행은 휴민트 없이는 완결될 수 없다. 영화 '휴민트'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바로 이 기본 원리를 정확히 짚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안보 현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된 사회다. 우리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테킨트에 많이 의존해 왔고, 그마저도 주한미군의 전략 자산을 기반으로 한 연합 정보체계에 크게 기대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대북 휴민트 역량이 구조적으로 약화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 배경은 비교적 분명하다. 남북 관계의 완화와 긴장 국면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휴민트는 외교적 부담이나 불필요한 긴장 요인으로 인식되었고, 민주화 이후 강화된 정보기관 통제와 엄격한 책임 구조는 실패 위험이 큰 현장 공작을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테킨트의 발전이 더해지며, 휴민트는 성과가 가시화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비효율적 수단'으로 평가절하되곤 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휴민트를 전략적으로 포기했다기보다, 장기적 관리와 투자가 필요한 자산을 충분히 유지하지 못한 채 점진적으로 소진해 온 상태가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더 우려스러운 건 북한의 대남 공작과 간첩 침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에도 우리의 제도적 대응은 오히려 축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국가정보원의 대공 수사권 폐지에 이어 국군방첩사령부 해체 추진 등은 권력 통제를 명분으로 하지만, 결과적으론 북한과 정보활동의 비대칭성을 키울 위험을 안고 있다. 상대가 휴민트·사이버·심리전을 병행하는 전방위 공작을 이어가는 동안, 우리는 현장 대응 역량을 스스로 약화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냉정히 되돌아봐야 한다.
정보 역량의 약화는 곧 국가 선택지의 축소로 이어진다. 상대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대응은 과잉이거나 무력해지고, 오판의 가능성은 커지며 불필요한 긴장은 반복된다. 정보는 첩보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외교·군사·통일 정책 전반을 떠받치는 토대다. 영화 '휴민트'가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 우리가 처한 안보 현실을 보다 입체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국가의 눈과 귀는 결국 사람이다. 이 단순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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