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이자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진만 동양대학교 교수이자 예술학박사가 희곡집 「미상리 미상번지」를 한 권의 희곡집으로 묶어 출간했다. 대체로 희곡집은 출판된 이후 공연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여러 차례 공연을 거친 뒤 희곡집으로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다소 이례적이다. 김진만 연출가에게는 교수, 연출가, 극작가, 기획자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2000년도에 세계 최초로〈2인극 페스티벌〉을 기획해 25년 동안 〈월드 2인극 페스티벌〉을 이끌어 온 인물이다. 한국 소극장 연극의 실험성과 창작 환경의 다양성을 확장해 온 기획자이기도 하다. 두 배우의 밀도 높은 연기와 서사적 긴장을 중심으로 한 2인극 형식은 한국 연극의 창작 환경 속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 잡고 있는데, 김진만의 이러한 시도는 공연예술의 제작 방식과 미학적 실험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연출 작업 가운데 특히 주목받은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익스트림 스포츠와 결합해 파격적인 무대 언어로 재해석한〈익스트림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
이 작품은 국립극장 '셰익스피어 난장'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화제를 모았고, 고전을 동시대적 감각으로 변주한 독창적 공연 사례로 호주 브리스번 세계학술대회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김진만 연출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고전 텍스트와 동시대적 공연 언어를 결합하는 실험적 연출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가 창작한 작품들은 장르적 경계를 넘나드는 특징을 보인다.〈미상리 미상번지〉,〈우중산책〉,〈보석보다 찬란한〉, 〈안아주세요〉,〈노인과 바다〉, <홀(HOLE)〉,〈씨름사절단〉,〈누구나 댄싱〉 등은 각기 다른 소재와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현대인의 불안과 사회적 긴장 구조를 유머와 풍자를 통해 드러내는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의 모순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아이러니와 상황적 유머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특징이다. 이번에 출간한 희곡집 「미상리 미상번지」도 이러한 결을 따라 80년대 격동의 현대사를 마주하게 한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미상리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은 국가적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미상리 마을은 시대 권력(權力)으로부터 자행된 조작과 은폐, 권력의 민낯을 조밀하게 들추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격동의 현대사로 지워낼 수 없는 미상의 지번, 1980년대 <미상리 미상번지〉
김진만의 희곡 〈미상리 미상번지〉는 제목에서부터 격동의 현대사로 지워낼 수 없는 80년대를 향하며 작품의 핵심적인 상징을 드러낸다. 강원도 화천의 '미상리'는 작가가 실제로 살았던 동네로 기억의 장소이다. 그러나 작가는 번지를 특정하지 않는 '미상번지'로 설정한다. 미상번지는 선명하면서도 지워낼 수 없고, 지워내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시대적 아픔이 배어 있는 한국사회 80년대 그 어디선가 자행된 공통된 지번일 것이다. 80년대 미상번지는 강원도의 한 농촌 마을이면서도 동시에 기록되지 않은 시대적 장소를 상징하는 은유적 공간이다. 작품의 배경은 1980년 강원도 화천의 산골 마을로, 사방이 군부대로 둘러싸인 휴전선 인근 지역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정확한 번지를 알 수 없는 '미상번지'에 살아간다. 하나뿐인 공용 안테나와 마을금고, 이발소, 정류장 등 제한된 생활 시설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산골 마을이다.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평온해 보이지만, 그 평온함은 외부 권력에 의해 흔들릴 수 있는 취약한 일상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일상의 균열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작품의 서사는 어린 소년 김봉만의 시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저축상 시상식' 장면은 희곡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고, 마을 사람들의 대화는 강원도 상서면 미상리의 생활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희곡 전반에는 극 중 인물들의 곗돈, 저축, 학교 행사 같은 생활 풍경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삶의 평범한 일상성 뒤에는 군부대와 보안대라는 국가 권력의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다는 설정만으로도, 이 작품은 작가의 기억 속에 침전되어 있는 시대 권력의 균열과 맞닿게 된다. 그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은 80년대 격동의 역사적 사건의 흐름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김진만은 바로 이 일상과 권력의 경계를 서사의 긴장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미상리 미상번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미상리는 군부대에 둘러싸인 마을로 등장인물 중 보안대 주임상사 전경호 같은 군 권력의 인물이 등장한다. 희곡은 이러한 군부 인물 배치를 통해 군사정권 시기의 권력 구조가 일상의 공간으로 침투되는 방식을 드러낸다. 어린아이의 학교 행사와 마을금고 시상식 같은 평범한 장면들 속에서 국가 권력은 은밀하게 작동된다. 이러한 공간적 설정은 단순히 농촌 풍경의 재현을 넘어 군사정권 시기의 사회적 긴장과 국가 권력의 그림자를 은유적으로 작품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런 점에서 마을을 둘러싼 군부대는 배경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정치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장치로 작동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상리는 특정 지역의 지명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씻겨낼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수많은 주변부 공간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번지가 없는 마을이라는 설정은 이런 점에서 현대사의 역사적 문제를 환기하게 한다. 김진만은 '기록되지 않은 미상번지 지번'을 무대 위로 소환함으로써 어린 시절 겪었던 시대적 트라우마를 여전히 겪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작품은 극 중 인물들의 집단 장면과 이야기 중심의 구성이 특징이다.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마을 전체가 하나의 집단 인물처럼 움직인다. 〈미상리 미상번지〉에서 중요한 특징은 마을 공동체 중심의 인물 구조다. 이 작품은 개인의 심리적 갈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드라마와 달리, 마을 전체가 하나의 집단 인물처럼 작동하는 구조를 지닌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마을금고와 학교 행사 같은 공동체적 사건을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저축상 시상식은 마을 공동체가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고 서로의 삶을 확인하는 80년대를 환기할 수 있는 공동체적 의례의 장면이다. 이 작품은 마을금고 이사장의 실종과 새로운 인물의 등장으로 급격한 전환을 맞게 된다. 도시에서 돌아온 시인 지망생 외삼촌 이영호와, 군인이었다가 갑자기 퇴임하고 마을금고 이사장으로 부임하는 전경호의 등장은 마을 공동체를 흔들어 놓는다. 그의 등장 이후 마을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며, 그동안 유지되던 공동체적 질서는 점차 균열을 드러낸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군사정권 시기의 권력이 일상 공간으로 침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작품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마을의 사건을 통해 권력의 작동 방식을 드러낸다.
이 점에서〈미상리 미상번지〉는 미시적 사건을 통해 거시적인 80년대 역사를 드러내는 희곡이고,〈미상리 미상번지〉는 시대의 트라우마로 봉인(封印)된 기억의 연극이다. 김진만은 작가의 글에서 "강원도 화천군 성서면 미상리. 미상리는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이다. 번지를 알 수 없는 미상리 미상번지. 하나씩밖에 없었던 공용안테나, 마을금고, 이발소, 중국집, 정류장 등과는 달리 마을을 빙빙 둘러싼 군부대는 참 많았다. 휴전선 인근에 위치한 미상리의 특별한 위치는, 알수 없는 긴장감이 감도는 그 시절 대한민국의 상황과 어딘가 비슷했던 것 같다.(중략) < 미상리 미상번지>는 휴전선 인근에 위치한 미상리에서 예전에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에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져 당시의 부조리한 시대상을 조그만 산골 마을의 사건 속에 담아냄으로써 현실을 풍자하는 이야기이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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