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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의 연극리뷰] 전인철 연출의 창작산실 작품 <튤립> "한국사회 튤립 정원에 묻힌 전쟁의 역사와 식민(植民)의 시간과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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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창작산실, 전인철 연출 튤립.
창작산실, 전인철 연출 튤립.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전쟁과 식민시대의 끝은 어디인가. 극단 돌파구의 〈튤립〉(김도영 작, 전인철 연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이 질문에서 출발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대체로 시대극이나 역사극 작품들은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 참혹한 역사성을 자극적으로 형상화하고,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갈등을 대립 중심으로 비극성을 환기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인철의 〈튤립〉은 출생의 비밀을 밝힐 수 없는 한 인물(쥬리프)과 아이를 잊을 수 없는 쿠로를 중심에 두고 그 시간의 층위를 섬세하게 쌓아 올린다. 극 중 장면으로 재현하기보다 시공간을 특정할 수 없도록 하나의 공간으로 뭉개 놓으면서도, 시간을 움직이는 초침은 100년 전의 시간이라기보다 끝나지 않은 전쟁과 식민시대의 비극적 전율을 극 중 인물의 현재로 끌어온다. 그만큼 '튤립'의 무대는 시간과 공간이 알뿌리에서 자라는 튤립의 구근처럼 단층으로 움직이면서도 밀폐된 공간에서 발화된다. 튤립 뿌리(구근)에서 퍼져 나오는 비극의 향은 김도영 작가가 구근을 심고, 전인철의 연출이 그 위에 튤립밭을 피워 올리며 관객도 그 향기에 중독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창작산실, 전인철 연출 튤립.
창작산실, 전인철 연출 튤립.

◇ 밀폐된 공간, 식민시대의 튤립 정원 "우리가 키워준 거야"

무대는 장면의 분할과 등·퇴장으로 연속되며 쌓이는 서사의 층위를 전인철의 뷰파인더로 바라보는 듯하다. 전쟁과 식민시대의 한 가족과 인물의 삶의 시간을 롱테이크처럼 무대화하고 있는데도 이 작품에는 총성도 폭격도 요란한 소리가 없다. 오직 튤립 향기 같은 아들의 체온을 잊을 수 없는 한 남자의 절규, 한 일본인 가족의 사악한 욕망과 전쟁과 식민시대의 비극만이 숨을 죽인 채 향기에 멈춰져 있을 뿐이다. 무대 구조도 구근의 형태처럼, 나라를 강탈당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처럼 통로가 막힌 박스형 구조로 밀폐된 듯 보이고 좌우 이동 통로도 없다. 식민지 시대의 형상처럼 일본식 목조주택은 형태가 아니라 공간으로 단일화된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괴기한 형상의 초상화와 시간이 죽어 있는 듯한 블랙 톤의 분위기, 국화꽃들과 무대 앞에 올려진 검은 모래더미는 튤립이 자라는 땅(정원)을 전인철의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일본식 이름으로 살아가는 조선인 남자 쿠로(권정훈). 그의 아들이면서 야마토(김정호), 에리코(황순미) 부부의 일본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튤립'이라는 이름의 청년 쥬리프(김하람). 그리고 이 집안의 비밀의 시간을 응시하는 가정부 미호(윤경)까지 다섯 인물을 통해 전인철의 〈튤립〉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찾아온 쿠로의 이야기를 따라 전쟁과 식민시대에 감추어진 한 가족의 비밀을 덤덤하게 응시한다. '튤립'은 일본어로 チューリップ(츄리푸, chūrippu)라고 발음되는데, 이 발음을 한국식으로 옮기면 쥬리프 또는 쥬립처럼 들린다. 배우들은 극 중 인물에서 거리를 두고 한 가족과 쿠로, 쥬리프(튤립)를 바라보는 응시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시 극 속 인물로 돌아와 서사를 이어가기도 한다. 배우들의 등·퇴장은 극 중 장면과 인물들 사이에 거리를 두며 이어지고, 공간의 벽면과 오브제들이 야마토 가족과 식민시대의 역사성을 환기하게 하는 전인철의 연출 방식은 극도로 미니멀하지만, 대극장의 공간을 다섯 명의 배우들이 온전히 유지하게 하는 배우들의 밀도 있는 연기도 인상적이다.

전인철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면 작가적 상징 장치인 튤립의 생태와 맞닿아 있고, 연출 또한 극 중 인물의 비극적 서사를 요란하게 형상화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침묵과 평온한 일상으로 덮여 있지만 '도련님'이라 부르는 쿠로와 그를 공손하게 대하는 쥬리프의 대화 속에는 덤덤한 태도 뒤에 감춰진 아픔이 스며 있다. 튤립은 원래 봄의 식물이다. 땅속 깊이 묻혀 있던 구근이 겨울을 견디고 올라와 꽃을 피우는데, 튤립의 생태적 구조는 이 작품의 서사와 묘하게 겹친다. 러일전쟁 이후 만주와 연해주, 경성을 거쳐 1920년대 도쿄의 한 집으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삶 역시 땅속에 묻혀 있던 기억처럼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도영 작가가 조선인 쿠로와 아들 쥬리프(튤립), 그리고 일본인 야마토 가문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전쟁과 식민의 역사를 묘하게 섞어 극 중 인물과 겹쳐지도록 '튤립'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인상적이다. 이번 작품에서 조선인 남자로 분한 쿠로 역의 권정훈 배우의 연기는 튤립 향보다 더 감각적인 잔향(殘香)을 남긴다.

창작산실, 전인철 연출 튤립.
창작산실, 전인철 연출 튤립.

배우의 육감과 감각으로 슬픔과 아픔이 메말라 몸으로 분출되는 절규는 소리가 없어 오히려 더 매혹적이다. 배우의 감각이 전인철의 공간에서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야마토로 분한 김정호 배우의 절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호 배우는 대사의 한마디, 특징적인 제스처와 움직임만으로도 극 중 인물로 무대 위를 전진한다. 전작들에서 그의 연기가 도드라져 보였다면, 전인철의〈튤립〉에서는 대사와 모든 움직임에서 힘을 빼는 절제된 연기를 보여준다. 그래서 전인철의〈튤립〉에서 자라나는 무대의 구근은 단단하게 형성된다. 러일전쟁 당시 총과 칼을 들고 만주 일대(연추)로 진군하던 길, 튤립밭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애 엄마의 목을 긋고 아이를 데려왔다는 야마토의 고백이 극 후반에 들릴 즈음, 야마토 가족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이 작품이 왜 '튤립'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나 "남들은 빼앗았다고 말하겠지만, 우리가 키워준 거야"라고 말하는 야마토의 대사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폭력적 역사 인식이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두 장면의 잔상은 잊을 수 없다. 쥬리프와 쿠로가 서로 강렬한 몸으로 끌어안는 장면은 춤의 움직임처럼 그 절규의 멜로디가 아름답고, 마지막 장면에서 쿠로가 검은 흙을 덮고 튤립 정원의 흙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은 죽음이 되어도 튤립의 구근이 되어 다시 아들 쥬리프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쥬리프를 향한 기다림이자 죽음으로도 잊을 수 없는 절규이다. 끝내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시간으로 남아 있는 역사는 마치 구근을 땅에 심고 겨울에 뿌리가 내려 봄이 되면 싹이 올라와 꽃이 피고지며 박혀진 구근만 남는 튤립 생태와도 닮아 있다. 전쟁과 식민시대의 역사는 100년의 시간을 돌아도 현재에도 역시 왜 이리 닮아 있는지. 전인철의〈튤립〉은 서사보다 연출적 장치와 권정훈, 김정호 등 배우들의 연기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창작산실, 전인철 연출 튤립.
창작산실, 전인철 연출 튤립.

▲전인철은.

전인철은 극의 배경과 시공간, 장면 전환과 등퇴장, 상황 안에 나열되어 있는 극 중 인물들을 점층적으로 무대와 구조로 나열하는 방식에서 동일 구조로 묶는 방식으로 전환해 텍스트에 내포된 의미를 가공하고, 재현연극의 거리두기를 통해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는 연출가다. 이러한 특징으로 그동안 전인철 연출은 시대의 담론과 동시대 사회적 논쟁을 적극적으로 무대로 용해시켜 오고 있다. 2006년 극단 '이와삼'의 <고요>로 데뷔한 이후 전인철을 무대로 각인시킨 작품은 김은성 작가의 작품 3부작 <시동라사>(2007), <순우삼촌>(2010), <목란언니>(2012)를 연출하면서부터다. 이 작품 시리즈를 통해 전인철은 무대를 채우고 비우며 작품들을 쏟아냈고, 극 중 인물 탈북 여성 '목란언니'는 고단한 남한 생활에도 한국 사회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탈북민'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노란봉투>(2017),<국부>(2017),<날아가 버린 새>(2019), <나는 살인자입니다>(2019) 등을 연출해 오면서 동시대의 현상과 담론을 무대로 제시해 오고 있다. <나는 살인자입니다>를 통해 정치와 과학의 불안한 결합을 디스토피아 세상으로 그려낸 바 있으며, 제54회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여성용 발레복 레오타드를 즐겨 입는 고등학교 2학년 준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회적 편견의 시선과 계층의 차이를 청소년연극의 특징으로 담아낸 바 있다. <순교>(2021) 이후 전통적인 연극 구조의 탈연극화를 시도하고 있는 작품 중, <키리에>는 오브제, 퍼포먼스적 장면과 이미지, 등퇴장과 공간의 일원화, 배우들의 탈연기화된 몸을 감각적인 표현으로 보여주었는데, 전인철 연극 형식의 정점(頂點)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해방 직후 발표된 월북작가 함세덕의 <고목>은 전인철 형식으로 현재화한 작품인데, 해방 후 미군정 시대부터 제헌국회 정국에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정치적 분열과 갈등, 친일청산과 좌우 이념 대립이 난무하던 194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배우 김정호의 연기가 돋보였으며 <고목>을 살려냈다는 평가다. 이밖에 연출 작품으로는 <헤다 가블러>, <지상의 여자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등이 있다.

창작산실, 전인철 연출 튤립.
창작산실, 전인철 연출 튤립.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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