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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산불 1년] 불길은 사라졌지만…"1년이 흘러도 상처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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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말라버린 고택, 돌기단만 덩그러니
임시주택엔 삶이 자리 잡았지만…"여전히 타향살이"
다시 짓는 사람·포기한 사람…엇갈린 복구의 온도차

19일 오전 지난해 봄 대형 산불로 소실된 사남고택. 무너진 이후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전종훈 기자
19일 오전 지난해 봄 대형 산불로 소실된 사남고택. 무너진 이후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전종훈 기자

지난해 봄, 마을을 집어삼켰던 산불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흔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불길이 훑고 간 자리마다 '시간이 멈춘 풍경'이 이어졌다.

◆ 검은 비닐 아래 멈춰 선 시간

청송군 파천면의 한적한 마을 안쪽, 사남고택이 있던 자리는 한눈에 봐도 폐허에 가까웠다.
검게 그을린 터 위로는 차광막과 비닐이 임시로 덮여 있었고, 한때 고택을 관리하던 관리동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19일 오전 지난해 봄 대형 산불로 소실된 사남고택. 무너진 이후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전종훈 기자
19일 오전 지난해 봄 대형 산불로 소실된 사남고택. 무너진 이후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전종훈 기자

고택의 흔적은 이제 기초였던 돌무더기뿐이다. 수백 년 세월을 버텨온 집은 단 한 번의 화염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뒤편 감나무 한 그루가 가까스로 서 있었지만, 생명력은 이미 다한 듯 보였다. 성인 한아름을 훌쩍 넘는 굵은 줄기는 검게 타 있었고, 껍질은 손끝이 닿자마자 바스러질 만큼 바짝 말라 있었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는 나무조차 살아남기 어려웠다.

19일 오전 사남고택을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까지 지난해 대형 산불에 무너지고 말았다. 전종훈 기자
19일 오전 사남고택을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까지 지난해 대형 산불에 무너지고 말았다. 전종훈 기자

아이러니하게도 입구에 있던 작은 화장실 하나만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덩그러니 남은 건물이 오히려 더 쓸쓸함을 더했다.

인근 서벽고택 역시 상황은 아슬아슬했다. 뒷산을 타고 내려온 불길이 담장과 뒷뜰까지 들이닥쳤지만, 마을 주민들의 필사적인 진화 작업과 바람 방향이 바뀌는 '한순간의 운'이 더해지면서 가까스로 화를 면했다.

담장 너머 화단에는 노란 꽃이 피어 있었다. 불길이 스쳐간 자리와 불과 몇 걸음 차이. 생과 소멸이 공존하는 풍경이었다.

청송군 청송읍 임시주택 단지는 여느 시골집과 비슷하게 입구에 장독들이 놓여져 있고 볕 좋은 곳에는 산나물과 버섯 등이 놓여져 있었다. 전종훈 기자
청송군 청송읍 임시주택 단지는 여느 시골집과 비슷하게 입구에 장독들이 놓여져 있고 볕 좋은 곳에는 산나물과 버섯 등이 놓여져 있었다. 전종훈 기자

◆ "이제는 한집처럼 삽니다"

청송읍 임시주택 단지로 내려오자 분위기는 또 달랐다.

겉모습만 보면 평범한 시골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 앞에는 장독대와 화분이 놓여 있었고, 처마 밑에는 표고버섯과 시래기가 가지런히 말려 있었다.

어르신 몇 명은 임시주택 옆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담소를 나누며 한낮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임시'지만, 시간은 이미 1년을 넘겼다.

주민들은 군에서 지원하는 전기요금 40만원 범위에 맞춰 생활비를 조절하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했다. 담장 하나 없이 집들이 붙어 있다 보니 사생활이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추석과 설을 함께 보내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주민 권모씨는 "이제는 가족이나 다름없다"며 "집들이 붙어 있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함께 식사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다 보니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자연스레 나누게 됐다. 누군가 아프거나 일이 생기면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의논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집을 잃은 직후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처음엔 다들 말도 없고, 우울하고, 그저 막막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상실의 시간이 지나고, 서로를 의지하는 관계가 그 자리를 채웠다. 임시주택은 더 이상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기 위한 '공동체'가 돼 있었다.

지난해 산불로 대부분 무너진 청송 달기약수터 상가들. 19일 오전 이제 곳곳에 땅을 다지고 새롭게 건물을 지으려고 한창 굴삭기 등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종훈 기자
지난해 산불로 대부분 무너진 청송 달기약수터 상가들. 19일 오전 이제 곳곳에 땅을 다지고 새롭게 건물을 지으려고 한창 굴삭기 등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종훈 기자

◆ 다시 짓는 사람과 멈춘 사람

청송달기약수터 상가 일대는 또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불에 타 무너진 상가들이 하나둘 철거된 자리에는 새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먼지와 소음 속에서 재기를 향한 몸부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복구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오랜 세월 '눈대중'으로 경계를 정해 붙여 지었던 건물들이 문제였다. 새로 측량을 하면서 땅 경계가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갈렸다.

분쟁을 벌일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일단 장사부터 해야 하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공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미 건물을 먼저 올린 몇몇 상가는 손님을 받느라 줄까지 세우는 상황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웃 상인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반면 아직도 빈터로 남아 있는 곳도 많다.

건축비가 문제다. 자재값과 인건비는 알아볼 때마다 오르고, 고령의 상인들에게는 재건 자체가 큰 부담이다.

피해 상가주 A씨는 "짓고 싶어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환갑이 넘은 나이에 다시 건물을 올리고 일을 시작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60대 이상 고령이 대부분인 상인들에게는 다시 빚을 내 사업을 시작하는 일이 쉽지 않다. 결국 일부는 복구를 포기한 채 빈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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