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법은 악법이다. 즉시 철회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
1959년 1월 7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전단을 뿌리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정부는 경찰전문학교 학생과 지방경찰관 500여 명을 동원하고, 장갑차 등 장비까지 투입해 시위를 막았다.
대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958년 12월 25일, 이미 한 차례 집회가 열렸다. 대구 중구 국립극장 앞에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민주당 경북도당을 비롯한 '국가보안법개악반대경북투쟁위원회'는 비를 맞으며 자리를 지켰고,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 완장을 찬 채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일주일 뒤, 민주당 경북도당은 다시 대규모 가두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찰이 도로를 봉쇄하며 시위대를 압박했고, 임문석 민주당 경북도당 위원장 등 10여 명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됐다.
무엇이 이들을 거리로 이끌었을까. 시계를 1958년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대통령 자리를 거머쥔 이승만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지난 1956년 대선에서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진보당의 조봉암이 200여만 표를 얻으며 존재감을 드러내서다. 이후에도 조봉암은 활발한 활동을 하며 이승만의 자리를 위협했다.
정치 환경도 여당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58년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민주당이 큰 혜택을 봐서다. 민주당은 무소속과 군소정당의 퇴조로 더 많은 의석을 획득했지만, 자유당은 의석의 2/3를 확보하지 못했다.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쐐기가 필요한 때였다. 꺼내 든 카드는 국가보안법 개정안이었다. 1957년, 이근식 내무부 장관은 "평화통일론자는 국가 주권을 부정한다"며,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듬해 자유당은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등의 언론통제 조항과 이적행위 개념을 확대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제출한다. 반대 세력을 범죄자로 규정할 수 있는 장치였다.
민주당 등 야당은 이를 자유 침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야당 의원 80여 명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하지만 법안 처리는 멈추지 않았다. 여당은 단독으로 법제사법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한 뒤 본회의에 회부했다. 1958년 12월 24일, 국회의사당 주변은 무장경관으로 둘러싸였고 일반인의 접근은 차단됐다. 저항하던 야당 의원들은 지하실에 구금되거나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른바 '2.4 파동'이었다.
반대 세력이 사라진 국회에서 법안 처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국회에 남은 자유당 의원들은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다. 이어 지방자치법도 개정해 자치단체장을 임명제로 전환하고, 이를 선거에 활용할 수 있는 기반까지 마련했다.
결국 국회 밖으로 밀려난 시민과 지역 정치세력이 거리로 나섰다. 당시 전국 최대 야당 지지 기반이었던 대구는 누구보다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정권의 대응도 강경했다. '국가보안법개악반대경북투쟁위원회' 간판은 강제로 철거됐고, 시위에 나설 경우 대구형무소에 수감하겠다는 경고까지 이어졌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도는 끝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59년 1월 15일, 국가보안법 개정안은 발효됐다. 이후 불법적 입법 과정에 대한 책임을 묻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한희석 부의장의 사퇴에 그치며 사건은 마무리됐다.
대구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간 듯 보였다. 그러나 한 번 벌어진 균열은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정당성을 잃은 입법은 오히려 정권의 기반을 약화시켰고, 이승만 정권은 끝내 민심을 버티지 못했다. 억눌린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2년 뒤 정권 붕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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