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고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서 남해도와 쌍벽인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화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제1장 '통영' 중에서)
통영은 문학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도시다.
극작가 동랑 유치진과 편지의 시인 청마 유치환 형제, 시조시인 초정 김상옥, 꽃의 시인 대여 김춘수, 흙과 생명의 작가 박경리 등이 통영 출신이다.
시인 정지용은 통영 기행문에서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아름다운 다도해 풍광이 사람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걸출한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것 아닐까.
◆박경리 기념관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년) 선생의 삶과 문학세계를 기리는 공간이다. 2010년 5월 5일, 바다가 내려 보이는 통영시 산양읍 언덕에 개관했다.
박경리 선생은 1926년 10월 28일 통영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박금이.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결혼한 남편이 6·25 전쟁 중 납북되면서 딸과 함께 지내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55년 단편 '계산'으로 등단, 1994년 대하소설 '토지'(5부 16권)를 완결했다.
기념관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통유리 구조와 적갈색 벽돌 외관의 건물로 지어졌다. 작가의 친필 원고, 여권, 편지 등 다양한 유품을 중심으로 전시돼 있다. 박경리 선생의 실제 모습을 담은 영상실과 작품, 논문을 열람할 수 있는 자료실도 함께 마련돼 있으며 유년 시절부터 중년기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사진이 전시돼 있어 선생의 삶을 시기별로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집필 당시 사용하던 집필실을 재현한 공간도 마련돼 있어 선생의 창작 환경을 직접 확인할 수 있고 박경리 공원이 조성돼 있어 자연 속 산책도 가능하다.
기념관에 나와 15분 정도 오솔길을 오르면 '박경리 묘소'에 다다른다. 선생은 2008년 5월 5일, 지병으로 타계 후 이곳에 영면했다. 묘소에서는 한산도 앞바다가 보인다. 기념관 입구부터 묘소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은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문학 작품의 무대 서피랑
서피랑은 박경리 작가가 태어난 곳이자 그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가자. 죽으나 사나 가야제." 한실댁은 코를 풀고 멍멍한 소리로 말하며 마당으로 내려와 용란의 손을 잡았다.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와 그들은 서문고개를 넘는다. 물 감는 처녀, 각시들로 밤길은 어수선하였다. 용란이 친정으로 올 때마다 이 고개를 울먹울먹 넘어가는 한실댁은 양지기만 같았다. 대밭골을 지났다. 인적은 끊어졌다.'
'서문고개'에서 뚝지먼당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박경리 작가의 생가가 있다. 박경리 선생 생가로 가는 길에 세워진 '김약국의 딸들' 육필 원고 표지석 내용이다.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에는 박경리 선생의 서피랑 명정골과 서문고개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신위를 모신 사당 충렬사 건너편 자투리 땅에는 시인 백석(1912~1996)의 '통영 2' 시비가 세워져 있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백석은 남쪽 항구 통영까지 내려와 충렬사 계단, 명정골 우물, 강구안 포구를 서성거리다 '통영'을 제목으로 한 시를 3편이나 썼다. 그 배경엔 통영 처녀 '난(蘭)'에 대한 애끓은 짝사랑이 있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조선일보의 '여성'지 편집일을 하던 시인 백석은 1935년 친구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알게 된 이화여고생 '난'(본명 박경련)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녀를 잊지 못한 스물네 살 청년 백석은 친구와 함께 그녀의 고향 통영을 방문했다.
"(전략)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 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후략)" ('통영-남행시초' 부분, 조선일보 1936년 1월 23일자) 시인 백석은 결국 통영 처녀 란(蘭)과 만나지 못했다.
◆김춘수 유품전시관
2008년 3월 개관한 김춘수 유품전시관은 봉평동 위치하고 있다.
통영읍 서정에서 태어난 김춘수(1922~2004) 시인은 통영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47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하며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꽃'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통해 한국 현대시의 대표적인 순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전시관은 통영항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164.8㎡의 소박한 규모로 자리 잡았다.
김춘수 시인의 육필 원고 126점과 서예작품, 사진, 생전 사용하던 가구와 옷가지 등 약 330점이 전시돼 있다.
출간된 시집도 연대순으로 전시돼 있으며 대표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등으로 알려진 김 시인의 작품 세계를 객관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전시관 내부에는 김춘수 시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공간을 재현한 '김춘수 방'이 마련돼 있다.
침대, 산수화 병풍, 액자 등을 포함해 실제 거주 공간과 유사한 형태로 꾸몄다.
다른 공간에는 평소 사용하던 소지품, 책, 옷가지, 사진 등이 함께 전시돼 있어 시인의 일상적인 모습과 삶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남망산 입구에는 김춘수의 '꽃'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시비가 자리한 곳은 시인의 생가에서 가까운 곳으로 유년 시절 추억이 깃든 고향의 공간이다. 시인이 바라보던 바다, 들리던 갈매기 소리, 머물던 배들이 보이는 그 풍경 안에 그대로 있다.
'꽃' 시비는 시민 주도 모금으로 세워졌고 김춘수 시인의 자필 글씨로 새긴 점도 의미를 더한다.
◆청마 유치환의 삶과 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중략)//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행복' 일부)
마흔을 바라보는 청마 유치환(1908~1967년)이 9살 연하의 정운(여류 시조시인 이영도의 호)에게 연시 '행복'을 써서 보냈던 곳은 통영우체국이다. 이 거리는 '청마거리'로 명명됐다.
청마문학관은 통영시 정량동 망일봉 기슭,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2000년 2월 문을 열었다.
문학관은 총 면적 4천26㎡ 규모로, 전시 공간은 '청마의 생애', '청마의 문학', '청마의 발자취'로 구분돼 꾸며져 있다.
이곳에는 유품 약 100점과 자필 원고와 관련 서적, 평론, 논문 등 문헌자료 약 350점이 전시돼 있다. 시인의 문학 활동과 시대별 변화, 평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문학관 내부에는 관련 도서와 문학 자료 열람이 가능하다.
문학관에는 청마의 생가가 함께 복원돼 있다. 청마의 생가는 실제 생가 위치가 아닌 인근 부지에 복원됐다. 초가 형태의 건물로 안채에는 방 두칸과 부엌이 있으며, 창고를 겸한 아래채가 자리 잡고 있다. 유치환 선생의 부친이 운영하던 유약국 관련 유품도 함께 전시돼 있다.
남망산을 오르는 길에는 청마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비엔 대표작 '깃발'이 새겨져 있다.
◆새롭게 꾸민 초정 김상옥 기념관
비 오자 장독대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도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김상옥-'봉선화')
초정 김상옥(1920~2004년) 선생은 1939년 '문장'지에 '봉선화'를 추천 받아 등단했다. 이 시는 두만강변으로 시집간 넷째 누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절제된 감정과 섬세하고 아름다운 가락으로 노래한 연시조다. 초정 선생은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뛰어났으며 서예, 전각, 도자기, 공예 등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최근 김상옥 선생의 생가(항남동 64번지)가 '김상옥 기념관'으로 재탄생했다.
1936년 목조 구조의 지상 2층 건물로 건립된 이곳은 초정 김상옥 선생이 태어나 자란 생가로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
기념관에는 김상옥 시인의 유품과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대표 시조부터 그림, 서예, 도자 작품뿐만 아니라 생전에 사용한 작업공간, 선생이 사용한 필기구와 노트, 붓도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2층의 한 방은 통영에서 김 시인과 교류했던 예술가들 이야기로 꾸몄다. 소설가 김경리,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중섭이 그 주인공들이다.
경남신문 김성호 기자 ksh@knnews.co.kr 사진 통영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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