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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서효봉] 늦은 시작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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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봉 소설가

서효봉 소설가
서효봉 소설가

10월도 중순이 지났다. 2026년은 이제 두 달 반 정도 남았다. 새해 첫날에 세웠던 계획을 떠올려 보자. 난 올해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을 더 많이 하기로 결심했다.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에 '출력'보다는 '입력'에 힘쓰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따로 독서할 시간은 없으니 틈새 시간을 활용해 책을 읽어야 했다. 책 들고 다니는 것도 무거워서 전자책 리더기까지 샀다. 출근할 때, 점심시간, 자기 전에 책을 읽기로 했지만, 실행한 날보다 어영부영 지나간 날이 더 많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리하여 올해 세운 계획은 폭삭 망했다고 생각하며 한숨 쉬고 있는데 아내가 카카오톡으로 기사 링크를 하나 보냈다. 기사 제목은 '여든 이후 1천400권 읽은 87살'이었다.

강릉에 사는 87살 박정옥 할머니는 여든이 되던 2018년에 마음을 먹었다. 이제 일할 나이도 지났으니 죽기 전에 책 1천 권을 읽자는 것이었다. 그 뒤 8년 동안 하루 평균 5시간씩 책을 펼쳤고, 읽은 책은 어느새 1천400권을 넘었다. 80대 가운데 책을 읽는 사람이 열에 하나 남짓이고 한 해 평균 독서량이 한 권에도 못 미치는 현실을 생각하면, 남들이 책을 덮는 나이에 오히려 책을 펼친 셈이다.

젊은 시절의 할머니에게 독서는 사치였다. 국민학교를 마친 뒤 보험 영업과 한복 바느질로 일흔다섯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은퇴 후에야 얻은 시간을 할머니는 책으로 채웠다. 소설과 철학, 종교, 뇌과학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다. 읽은 책마다 번호를 매겨 적은 독서 노트는 열 권이 됐고, 딸이 이를 엮어 지난달 '늦은 나이는 없다'라는 책으로 펴냈다.

책은 할머니의 생각을 바꾸기도 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으며 평생 품어 온 믿음을 고쳐 생각하기 시작했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사람이 겸손해지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독서를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일'에 빗댄다. 물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도 콩나물은 자라듯, 읽은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조금씩 자신을 키운다는 것이다.

시작이란 무엇일까. 한자로 시작(始作)은 '처음 시(始)'와 '지을 작(作)'이 만난 말이다. 무언가를 처음 짓는다는 뜻이다. 몸을 움직여야 일어나는 일, 그러니까 결심이 아니라 행동이다. 한번이 아니라 매일 다시 하는 일이며, 결과를 모른 채 앞으로 나아가는 소박한 믿음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늦은 시작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 듯하다. 시작은 언제나 '지금'에만 일어나는 일이니까. 망했다고 생각한 나를 들여다본다. 잘하고 싶었던 마음, 그것만으로도 어깨를 토닥여 줄 만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가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마음먹은 걸 시작할 때'다. 늦은 시작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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