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2025년 기준 세계 6위의 수출국이자 9위의 수입국이다. 무역의존도가 92.8%에 이르는 전형적인 수출주도형 통상 국가다. 올해는 반도체 수출 호황에 힘입어 수출 1조 달러를 달성하며, 일본을 제치고 세계 5위 수출 대국이 될 전망이다. 2026년 9월까지의 누적 수출액은 8,147억 달러로, 이미 2025년 연간 수출액 7,090억 달러를 앞질렀다.
그러나 수출 규모 확대가 곧 통상 강국의 완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한국 수출의 상위 5개국 비중이 2025년 55.7%에서 2026년 63.5%로 높아지면서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전체 수출의 42%를 반도체가 차지하는 등 수출 품목의 구조적 취약성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교역 상대국 다변화와 통상 생태계 확장을 위해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을 추진해 온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글로벌 통상 국가가 갖추어야 할 핵심 자산은 국가 차원의 '제도적 신뢰'와 기업 차원의 '거래적 신뢰'다. 제도적 신뢰는 투명하고 일관된 통상정책과 국제 규범 준수를 통해 확보된다. 거래적 신뢰는 공급망 관리, 지속가능 경영, ESG 역량 위에 세워진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농수산업계 반발로 CPTPP 가입 추진이 갑자기 재검토되는 상황은 우려할 만하다. 본격화되던 가입 논의가 국내 정치적 사정에 따라 흔들린다면, 교역국들은 한국의 통상정책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인식할 것이다. 이는 장기적 통상 확대 전략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전 EU 통상집행위원장 피터 맨델슨(Peter Mandelson)은 "정치가 운전대를 잡고 경제가 뒷좌석에 앉을 때, 통상정책은 항상 첫 번째 코너에서 전복된다"고 경고했다. 이는 도하개발라운드(DDA) 협상에서 프랑스 등 EU 농업 강국이 자국 농가의 표심을 의식해 농산물 관세와 보조금 인하에 저항하던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의 한국에도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CPTPP는 단순한 관세 인하 협정이 아니다. 일본·호주·멕시코·캐나다·베트남 등 주요 회원국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과 경제 안보 강화를 추구하는 다자간 경제협력 체제다. 유럽 국가 최초로 영국이 12번째 회원국이 되면서 그 위상이 높아진 CPTPP는 전 세계 GDP의 약 15%를 차지하며, 5억 명 이상의 인구를 포괄한다. 관세 철폐를 넘어 회원국 간 공급망 연계와 협력을 심화하고 있는 이 협정은, 자원이 부족하고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게 통상 파트너로서의 신뢰를 높이고 공급망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중요한 통상 인프라다.
특히 CPTPP 회원국인 멕시코는 한국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 거점이다. 중국 의존도를 줄이려는 니어쇼어링 전략의 핵심 후보지이자 한국의 10대 수출국이기도 하다. 한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멕시코는 2026년 1월부터 협정 미체결국을 대상으로 1,463개 품목에 대해 최대 50%까지 관세를 인상하는 등 보호무역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멕시코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으므로, CPTPP 가입을 통한 관세 혜택이 시급한 시점이다.
대러시아 석유제품 수출 문제 역시 국제 규범에 비춰 다뤄져야 한다. 한국 정부는 해당 품목이 국내 수출통제 품목에 해당하지 않아 국내법상 위반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운송에 투입된 선박이 영국·EU 제재 대상이고, 최종 도착지가 불분명한 상황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국제 사회의 제재 대상 물자를 불법 또는 비공식적으로 운송하는 '그림자 선대(shadow fleet)'가 동원된 수출은, 비록 국내법상 위반이 아니더라도 서방 우방국의 대러 제재 효과를 약화시키고 지정학적 마찰을 초래할 소지가 크다. '신뢰할 수 있는 우방'이라는 한국의 이미지를 지키려면, 우방국들이 공유하는 규범과 제재의 취지에 부합하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지정학적 위기의 상시화, 미국 관세정책의 불확실성, 공급망 무기화 속에서 글로벌 통상 환경은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런 시기에 CPTPP 가입 추진 중단과 대러 제재 회피 논란은 한국의 신뢰를 훼손할 위험이 크다. 한국이 단순한 수출 규모를 넘어 글로벌 통상 및 공급망 규범을 선도하는 진정한 '통상 강국'으로 도약하려면, 정책의 일관성이 담보된 '제도적 신뢰'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 우방국과의 신뢰 확보가 그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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