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건표의 연극리뷰] "시력을 잃은 뒤, 연극 무대가 더 잘 보이죠" 배우 남호섭의 희비극적 인생, 김현희 교수의 렉처 퍼포먼스 <퍼펙트 블라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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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교수(연극평론가)

퍼펙트 블라인드. 씨아뜨 컴퍼니
퍼펙트 블라인드. 씨아뜨 컴퍼니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시각장애인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어버린 속초 출신 남호섭 배우와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 김현희 교수가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인문학적 의미와 두 사람이 만나 공연을 하기로 한 과정을 렉처 퍼포먼스 형식으로 공연화한〈퍼펙트 블라인드〉(김애자 작·연출, NC 문화재단 Stage Black)의 이야기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요소를 현대인의 일상과 인간 본질에 연결하면서 인간의 운명과 진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공연이다. 강연 형식에 오이디푸스의 주요 장면들을 적절하게 섞어 고전을 통해 오늘의 현상을 인문학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한 공연이라 할 수 있다.

◇"보이는 것 만을 맹신(盲信)하는 사회" 오이디푸스의 경고, 〈퍼펙트 블라인드〉

무대도 렉처 퍼포먼스 형식이 지루하지 않도록 미니 라이브 콘서트 무대처럼 구성했다. 화려한 시각적 장치보다 배우의 연기와 텍스트, 음악과 영상의 결합을 중심으로 후면 스크린에는 스핑크스의 문답을 투사하고, 좌측에는 라이브 연주, 중앙에는 고전 서사와 현대인의 삶을 재연하는 연기 공간, 우측에는 강연용 테이블을 배치하고 있다. 남호섭 배우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강연자와 오이디푸스를, 김현희 교수는 강연자와 이오카스테를 맡아 고대의 비극과 스마트 시대 현대인의 특징적인 일상을 연결하는 작품으로 구성됐다. 손명구는 크레온과 대리기사, 원종수는 오이디푸스와 횡단보도의 남자, 윤소희는 안티고네와 현대의 인물로 출연해 고전과 현대를 교차시킨다. 특별한 것은 렉처 퍼포먼스라는 형식보다 남호섭 배우가 말한 대로 "시력을 잃게 되면서 인생과 삶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됐다"라는 역설적인 말에 있다. 자신의 눈을 찔러 비극적 운명과 마주한 오이디푸스 왕처럼 남호섭 배우는 시각장애인이 된 것이 비극적인 삶이라기보다 더 많은 인생의 깨달음을 얻게 된 자신의 인생을 오이디푸스의 서사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특히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라는 그의 말이 이번 공연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대사다.

특히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끌었던 고전의 재해석은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에 등장하는 테베의 역병을 현대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 전환한 방식이다. 고대 테베의 역병이 라이오스 왕의 살인사건과 연결된다면 현대사회의 역병은 물질적 성공과 경쟁,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폭력적인 언어로 나타난다는 점을 부각하는 설정 전환의 방식이다. 극 중에서 자동차와 시계, 양복과 구두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인물들의 대화는 물질만능주의 사회를 풍자하고, 대리기사에게 폭언을 일삼는 손님의 태도는 인간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기능적 존재로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선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특히 고전극에서 등장하는 신탁을 현대의 무당과 AI 상담으로 연결한 장면도 흥미롭다. 취업을 앞둔 청년은 무당에게 합격 여부를 묻고, 직장인은 AI에 퇴사 여부를 상담하지만, 어느 쪽도 명확한 정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고대의 신탁이 현대의 AI로 바뀌었어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고 선택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맡기려 한다는 점에서 고전의 운명론을 현대인의 불안과 자기 결정의 문제로 전환한 것도 흥미롭다.

퍼펙트 블라인드. 씨아뜨 컴퍼니
퍼펙트 블라인드. 씨아뜨 컴퍼니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인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한 삼거리 사건(극에서 오이디푸스가 테베로 가던 중 삼거리에서 마차를 탄 친아버지 라이오스 왕과 길을 비키는 문제로 다투다가 아버지인 줄 모르고 살해한 사건)을 2026년 서울의 횡단보도로 옮겨놓은 장면에서는 현대적 변용도 유연한 장면이다. 현대사회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가끔 사소한 충돌이 폭언과 모욕으로 이어지고, 순간적인 분노가 폭력과 살인이라는 끔찍한 사건으로 번지기도 한다. 실제 층간소음이나 주차 시비, 도로 위의 사소한 갈등이 폭행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겪던 20대 남성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50대 이웃 주민을 살해하는 실제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처럼 일상적인 갈등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의 삼거리 사건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장면은 〈퍼펙트 블라인드〉에서 오이디푸스가 테베로 향하던 중 삼거리에서 길을 비키는 문제로 다투다가 친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사건과 겹쳐지면서도, 이어지는 현대로 전환된 횡단보도 장면에서 타인의 고통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면서도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무관심을 보여준다.

극 중 장면을 돌아보자. 어깨가 부딪히는 사소한 충돌이 폭언과 모욕으로 이어지고, 폭력적인 충동을 느끼지만 끝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인물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언어의 난투극에도 신호등은 바뀐다. 자동차는 출발하고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움직인다.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무관심이야말로 이 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이다. 또한, 오이디푸스의 고전에서는 신탁에 따라 비극적인 사건이 운명적으로 일어났다면, 현대사회에서는 신탁과 관계없이 인간의 삶에서 비극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오이디푸스의 관계를 돌아보자. 오이디푸스는 시력을 가지고 있지만, 출생과 운명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신탁에 따라 운명이 비극적으로 바뀌게 되는 인물이다. 테이레시아스는 시력을 상실했지만 진실을 알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에 나타나는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역설이 시력을 잃은 남호섭 배우의 삶과 연결되는 극 중 장면 배치도 흥미롭다.

특히 남호섭 배우가 테이레시아스를 연기하는 장면은 배우 자신의 경험과 고전 속 인물이 겹쳐지면서, 시각장애를 단순한 극복의 이야기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과 진실을 아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공연은, 인상적이다. 고전의 장면과 강연 형식, 현대적인 상황극, 라이브 음악과 영상을 교차시키면서 관객이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오늘의 문제로 인식하도록 했다는 것도 그렇다. 특히 이번 공연의 장점은 강연 형식으로 오이디푸스의 서사를 쉽게 이해하도록 했고, 극 중 장면들은 고전과 현대사회의 문제를 연결했다는 점이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남호섭 배우의 실제 삶과 현대사회의 문제로 연결한 구성은 고전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렉처 퍼포먼스의 가능성을 보여준 공연이라 할 수 있다. 남호섭 배우는 시력을 운명처럼 상실한 뒤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더 밝아졌다는 말에서 <퍼펙트 블라인드〉가 주는 의미가 녹아있다. '눈으로 보는 것과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되고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볼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 인생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삶의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이 작품의 메시지다. 시력을 잃은 배우는 오히려 세상을 더 많이 보게 됐다고 말하고, 시력을 가진 우리는 눈앞의 사람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공연 뒤 배우도 관객도 짠해지는 이유다. 배우들의 연기도 렉처 퍼포먼스 형식 속에서 파편적인 극 중 장면마다 고전 속 인물로 분했다가 때로는 현대적인 인물로 변주하는 등 고전과 현대적인 장면 전환이 유연하면서도 진지해 인문학적 의미의 온도를 높여준 공연이다.

퍼펙트 블라인드. 씨아뜨 컴퍼니
퍼펙트 블라인드. 씨아뜨 컴퍼니

▲ 남호섭 배우는.

2004년 연극〈날 보러 와요〉로 최연소 우수연기상을 받은 뒤, 2005년 가을쯤 망막 포도막염이 발병하면서 왼쪽 눈의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오른쪽 눈에도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시력이 나빠져도 연극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 고향 속초로 돌아가 극단 소울씨어터를 창단하고 배우, 연출, 기획까지 맡아 활동했다. 시력을 잃게 되면서 자신의 연기 세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무대에서 불안하고 상실감이 클 만도 한데 그는 오히려 더 적극적인 배우가 됐다. 시력의 90% 이상을 잃은 뒤 남호섭 배우는 2018년〈만주전선〉에 출연해 제35회 강원연극제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같은 해 대한민국연극제에 강원도 대표로 참가하는 등 시력을 잃어가는 과정에서도 연극 활동을 이어왔다.〈그날, 그날에〉, <아카시아 흰꽃은 바람에 날리고〉,〈카운터포인트〉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2020년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바탕으로 한 관객 체험형 공연 〈블라인드 씨어터〉를 제작·연출하는 등 배우와 연출가, 기획자로 활동을 넓혀왔다.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어도 무대는 잘 보인다고 말하는 남호섭 배우는 고향 속초에서 안마원을 운영하면서 연극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남호섭 배우의 연극 인생을 다룬 김재영 감독의 다큐멘터리〈초승달의 집〉(2018)도 있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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