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어드는 저녁-11아마 은유로부터 받은 자극 때문에 더욱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언제인가부터나는 남의 시를 노트에 베껴 보는 버릇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또박또박베껴 써 보면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가질 수 있었다. 그래도 시의 의미가 가슴에 선뜻 와 닿지 않을 때는 소리내어 읽어 보고, 그래도 아득할 때는 그 노트를 들고 다니며 틈틈이 외운다.그리곤 잊어버린다. 그런데 그것이 놀랍게도 힘을 발휘할 때가 있었다. 불현듯 그 시구가 떠오르면서 아, 하고 깨달아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소중히 보관한다. 지금까지 베껴 써 놓은 것만 해도 두툼한 대학노트로 다섯권이 넘는다. 그리고 나는 꼭꼭 일기를 쓴다. 쓸 거리가없으면 단 몇 줄이라도 안 쓰는 일이 거의 없다. 요즘은 작은오빠의 권유로시 형식을 빌려 일기를 써 보기도 하는데 그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인 것같다. 먼훗날 내가 시인이 된다면 꼭 그렇게 돼야 하고 되겠지만, 그때 나의진정한 스승은 모르긴해도 이것들이 될 것이다.
꿈속에서도 꿈으로 와요 / 바람이 자면 안 올까 바람 구멍 속으로 와요 / 앉았다 누워도 와요 / 누웠다 서도 와요 / 수도의 페놀처럼 당당히 / 젖은 사진적시며 / 머리칼 올올이 와요 / 공기로 타는 슬픔.
[아버지가 깨셨어. 죽 좀 데워 주겠니?]
작은오빠가 문밖에서 말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방 중앙에 멀뚱히 앉아 계셨다. 장미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 꽃과향내에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냉장고 속에 넣어둔 녹두죽을 아버지의 사발에 덜어 전자자에 삼분쯤데웠다.
[신경쓰지 말고 들어가서 공부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내가 차려준 상을 조신히 들고 들어가며 작은오빠가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작은오빠는 더없이 효자다. 아버지의 수발을 혼자 도맡다시피 하는데도 저렇듯 싫은 기색도 없다. 어쩌면 저것도 천성일까 하고, 나는 작은오빠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알뜰히 곱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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