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반세기 생활변천50년(6)-관혼상제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떱디까/ 아고얘야 말도 마라 고초당초 맵다한들 시집같이 매울소냐/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떱디까/ 아고얘야 말도 마라 명주치마 다홍치마 눈물씻기 다버렸다"경북 영일 지방에서 채집된 시집살이 노래의 한 귀절이다. 요즘 대도시의 호화로운 예식장에서 20분도 채 안돼 결혼식을 마치는 신세대 여성들은 불과3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이같은 시집살이 노래가 과장없이 대다수 새색시가 겪어낸 일상적인 생활상이었다는 것을 거의 실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신랑 얼굴도 한번 못보고 18세 때 부모가 정해준 신랑에게 시집을 갔지요.혼례식 날 붉은 치마 푸른 저고리에 족두리를 쓰는등 전통 혼례복을 하고 있었는데다 온종일 마을 사람, 신랑쪽 친척들에 둘러싸여 있어 부끄러워 뒷간에 간다는 말을 못했지요.이 바람에 오줌을 싸 곤욕을 치른 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해방 후 시집을 갔다는 김연복 할머니(65·대구시 서구 내당동)의 회고담이다. 50년대 까지만 해도 촌락단위의 농촌 중심 사회였던 우리나라는 혼례가있으면 온 마을 전체가 잔치집 중심으로 축제분위기에 접어들며 이웃집에서는 단술,묵등 잔치에 쓰일 부조용 음식물을 만드느라 덩달아 분주했다.연지곤지를 찍은 새색시는 마당에 쳐놓은 천막 안에서 신랑에 눈길 한번 못주고 평생 순종할 것을 맹세하는 큰 절을 연거푸 4번이나 올렸으며 신랑의사지가 멀쩡하기만을 고대할 뿐이었다.

그러다 60년대 들면서 소도시에까지 서서히 서구식인 예식장 결혼식이 번졌고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70년대 이후는 일부 벽촌 외에는 전통 혼례 모습을거의 찾아 볼수 없게 됐다.

최근 대도시 예식장은 한달 이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주말마다 붐비고 있으며 예식시간도 30분 내에 마치지 않으면 앞 뒤 혼례식을 혼동할 정도가 돼 손님들이 혼주를 확인하지 않으면 의외의 실수를 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손님들도 부조를 하거나 혼주만 대면하면 의무를 다했다는듯 바삐 돌아가 신랑 신부의 얼굴조차 제대로 못보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이같은 예식문화에 반발하는 요즘 일부 젊은 세대들은 향교에서 양복과 흰드레스 대신 사모관대와 치마 저고리 족두리를 쓰고 전통 혼례를 올리는 경우가 늘고 있으며 야외 결혼식, 수중 결혼식, 산상 결혼식, 심지어 신랑이행글라이더를 타고 날아와 신부와 만나는 이색 결혼식까지 치러지고 있다.해방 당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신혼여행도 대구 경북지역 경우 60~70년대들어 부산이나 진주.마산등지를 3~4일 다녀 올 수 있는 정도가 됐고 80년대들어선 제주도 여행이 일반화됐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선 동남 아시아.하와이.괌.타히티등 해외여행도 낯설지 않게 됐다.

혼수품도 그간의 경제 발전과 소득 수준 향상을 반영하듯 해방 당시와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준다. 50년대까지만 해도 보통 부부와 시부모가 사용할의복과 이불등을 장만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60년대 이후 장롱 정도가 추가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남자 경우 의사 판.검사등 이름값 높은 직장을 가진 신랑감의 몸값이 상승, 소위 전문 중매쟁이인 '마담 뚜'가기승을 부렸으며 딸을 둔 부유층은 '아파트.자동차.예금통장'등으로 대변되는 호화 혼수품까지 제공해 사회적 물의를 빚기까지 했다.

한편 90년대 들어서는 여권신장등 사회적 변화 바람으로 직장을 가진 여성이늘면서 경제적 이유등으로 현모양처형보다 의사.약사.교사등 '사'자가 붙은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총각들로부터 일등 신부감으로 찍히는 새로운 현상이나타나고 있다.

광복 50년이 가져온 생활상의 변화는 상례도 예외가 아니다. 해방 전후만 해도 뿌리깊은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부모가 사망하면 효성이 부족한 것으로생각, 자식들은 죄인 의식을 느꼈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부모가 사망하면 자식들은 삼베로 지은 굴건.제복을입고 구슬피 곡을 했지요. 웬만한 가정은 5일장 이상을 지내고 탈상을 할 때까지는 위패를 집안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공양을 했습니다. 요즘은 웬만하면 병원 영안실에 빈소를 마련하고 3일장을 치르면 언제 그랬냐는등 잊어버리는 것이 세태인 것 같은데 무언가 빠진 부분이 있는 것같아 허전해요"김재환씨(60.북구 산격동)는 7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운구 수단도 영구차가점차 일반화돼 이제 자손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만장을 들고 상여를 따르는모습이나 상여꾼의 구슬픈 상여노래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며 아쉬운표정을 지었다. 이제 유교식 장의문화는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 추세에다 실용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사고가 자리잡으면서 구시대의 유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90년대 들어 아파트 중심 주거문화가 일반화되면서 빈소를마련하거나 관을 옮기는 불편등이 크고 정부에서도 국토 관리 차원에서 묘지사용 연한 제한, 화장 장려등에 나서고 있어 갈수록 장의절차의 간편화.편의주의화 현상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조상의 유덕을 기리는 제례도 크게 간소화되고 있으며 설이나 추석 때는 휴양을 겸해 호텔이나 콘도에서 차례를 지내는 경우도 다반사로 보게 됐다.영남대 김택규 교수(문화인류학과)는 "전통 가례 형식의 극심한 변천에 따라 그 안에 담겨 있는 미덕들인 효친 사상, 이웃간 정의, 혼인의 엄숙함등까지 사라지는 것같아 안타깝다"며"물질 위주의 사회 속에서도 이들 정신적인 덕목들은 합리적인 방향으로 살려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