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고을 원(員)이 있었던 지방의 중소도시에 가면 비석거리라는 데가 있다. 그곳은 관청의 입구가 되는 도로로, 크고 작은 공덕비가 세월의 풍상을 이끼로 덮어쓴채 줄지어 늘어서있다.*비석은 생애 새긴것
조선조때는 한 고을을 다스렸던 원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 그 치적을 돌에 새겨 공덕을 기렸다.물론 선정을 베푼 이들은 자신의 공덕비가 세워지는 것조차 마다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가렴주구만을 일삼던 오리(汚吏)들은 재임말기에 스스로 공덕비를 세운 경우도 있었다하니 비석에 적힌 문구들을 다 믿을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요즘도 비석거리앞을 지나칠때면 한사람의 생애가 영원한 역사속에 작은 돌로나마 남아있다는 사실이 때론 부럽기도 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비석에 스스로 글귀를 새기고 있다.요절한 시인은 못다한 노래를 새기고 학문적 일가를 이룬 철학자는 자신의 사상을 또렷하게 새긴다. 현세의 인정과 사후의 평가가 곧 비문이 된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직수가 피륙을 짜듯 생애를 엮어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비석에남길 비문을 스스로 쪼고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비석에는 정말 아름다운 글귀를 새겨 후예들의기림과 존경, 그리고 숭모를 받기를 원한다. 결코 가래침이나 뱉고 돌아서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그런데 최근 우리나라는 명망있는 정치가와 은행가, 심지어 대통령의 아들이란 귀한 신분들이 국민들이 저주에 가까운 질타를 퍼부을 글귀들을 그들의 비석에 새기고 있어 몹시 안타깝다.*백비, 청백정신의 귀감
조선조 명종때 명신 박수량(朴守良)은 임금으로부터 아무 글귀가 적혀있지 않은 백비(白碑) 하나를 하사받았다. 그는 호조판서와 지중추부사등 38년간을 공직에 봉사했으나 초가삼간이 재산의전부였다. 임금은 그의 청백정신을 도저히 글로써 표현할 수 없다하여 백비를 내린 것이다. 명종은 참으로 멋쟁이였다.
고려 충렬왕때 비서랑을 지낸 최석(崔碩)은 팔마비(八馬碑)의 주인다. 그가 승평부(昇平府)부사로근무한후 승진하여 개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당시 풍속은 부사가 떠날때 말 8필을 선물로주는 것이 관례였다. 새 임지에 도착한 최석은 귀경 도중에 낳은 망아지를 합쳐 말 9필을 승평으로 돌려 보냈다. 승평사람들은 떠난 부사의 공덕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역사속에서 찬란히 빛나는팔마비의 내력이다. 이로써 태수가 바뀔 때마다 말을 상납하던 폐습이 없어졌다고 한다.*오물 덮어쓴 '칼국수비'
우리 역사속에는 백비와 팔마비 같은 아름다운 비석들이 서 있는가 하면 아비와 아들이 성실과정직의 선비정신을 살려 후세의 귀감이 된 사례도 많다.
조선조 성종때 정척(鄭陟)은 충효를 바탕에 둔 청백리였다. 아들 성근(誠謹)도 가풍을 그대로 이어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다가 도주(島主)가 선물로 준 토물(土物)을 받지 않았다. 그 선물은 조정을 통해 다시 전해졌으나 거절했다. 연산군때 갑자사화로 피살되자 그 아들 주신(舟臣)이 아비의뒤를 따라 굶어 죽었다.
역사는 모든것을 기록하고 모든것을 남긴다. 역사는 역사의 비석에 아무도 지울수 없는 명문을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앞에서 엄숙하게 된다.
현철씨가 대통령의 아들로선 헌정사상 처음으로 구속됐다. 죄목은 특가법상 알선수재와 조세포탈혐의다. 대통령의 칼날같은 사정의지에 비기면 대역반란죄요, 추락하는 우리 경제로 볼땐 대파렴치범이다.
대통령이 취임초부터 세우기 시작한 '칼국수비'는 아들탓으로 오물 한 바가지를 덮어쓴 '오비(汚碑)'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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