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전개 당시 양기탁 선생은 영국인 베델(Bethell)과 함께 1905년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사의 총무겸 주필을 맡고 있었다. 선생은 실질적인 신문사 경영책임을 지는 것은 물론 박은식, 신채호 등 당대의 논객들과 함께 항일 논설을 게재, 민중들의 애국애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당시 최고 부수를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처음에는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의연금을 모아 거액의 국채를 갚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국에 걸쳐 들불처럼 일어나는 열의에 태도를 바꾸었고 이후 국채보상운동의 전국화를 이끄는 주도적 기관이 됐다. 특히 양기탁 선생은 전국에서 답지하는 성금을 중앙에서 총괄할 필요성을 느끼고 1907년 4월 신문사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마련했다. 이후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어 전국 각계각층의 성금이 잇따랐다.
운동 초기 이를 가볍게 여겼던 일제 통감부는 열기가 점차 고조되자 어용언론인 경성신문, 더 서울 프레스와 친일언론인 국민신보 등을 통해 비난 여론을 조성했다. 또 '신문지법', '보안법' 등의 악법을 제정, 대한매일신보의 언론활동을 탄압했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한 것은 1908년 7월 기금을 관리하던 양기탁 선생을 '국채보상금비소사건'으로 옭아매 구속한 일이다. 선생은 모금액을 늘리기 위해 금광의 주식을 사고 개인 사업가에 대출했으나 일제는 이를 개인적 횡령으로 조작,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증거불충분으로 곧 풀려났다. 처음부터 일제가 노린 것은 의연금 횡령에 대한 수사가 아니라 선생에 대한 탄압과 국채보상운동의 와해였다.
일제의 악랄한 책략으로 국채보상운동은 3년여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국채보상금 의연금을 국가의 인재를 양성할 민립대학기금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훗날 민립대학 설립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 민족교육운동이 부흥하는 계기를 맞게 됐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이 일제의 파괴공작으로 무산됐으나 선생이 일궈놓은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은 훗날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됐다.金秀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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