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방송이나 신문지상을 통해 '설계사(設計士)'라는 출처불명의 용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하던 이 말은 아마도 '사(士)'자 붙은 직업을 선호하는 우리네 풍토 속에서 건축의 다양한 직능분야 중 설계를 주업무로 하는 전문가를 타영역(예를 들어 시공기술자 등)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언론종사자들이 만들어낸 신조어로 여겨진다.
하지만 건축가를 설계사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판사를 '재판사'로, 외과의사나 내과의사를 각각 '수술사'나 '진단사'로 표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어떤 건물의 형태와 공간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계획하여 그 결과를 설계도면으로 옮기고 난 뒤, 행정적인 절차에 따라 허가를 맡고 건축시공현장에서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건축의 전과정을 책임지고 살펴보는 것이 건축가의 기본역할이다. 그런데 이중 단순히 설계도면을 그려내는 행위만을 좁혀서 지칭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 설계사라는 용어이므로 '건축가(建築家)'또는 경우에 따라'건축사(建築士)'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 호칭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건축가라는 명칭 속에 뭉뚱그려 연상하게 되는 건설현장의 시공기술자나 구조 및 설비전문가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가'와 '건축사'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건축사란 면허를 받은 건축가(Registered Architect)를 의미한다. 즉 명시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설계행위를 하는 많은 건축가들 중 자격시험과 면허부여를 통해 법률적으로 직능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건축가에 대한 이러한 호칭문제가 국제적으로 중요한 논쟁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GATT 이후 국제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WTO체제하에서 서비스분야의 개방에 따른 건축가의 국가간 상호인정문제가 첨예한 국가적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따라 현재까지 각 나라별로 상이한 용어와 의미로 사용되어 왔던 '건축가'에 대한 명칭이 전반적으로 재정의 되어야 할 시점에 와있다. 굳이 WTO나 외국의 사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올바른 형식에서 올바른 내용이 나온다는 측면에서 정확한 명칭의 사용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용으로서 '건축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자. 십수년전 서울의 세종로에 세종문화회관이라는, 국내 최대규모의 다목적 공연시설이 완공된 적이 있다. 그당시 유명 일간신문들의 문화란을 보면, 대극장 내에 설치된 국내 최대인 파이프오르간의 성능과 크기, 그리고 가격 등에서부터 심지어는 현관 로비 천장에 달려 있는 외국산 샹들리에의 가격까지 기사화하면서도 막상 그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에 대한 소개는 없거나 이름 석자만 짤막하게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 또한 어떤 오케스트라단을 기사화할 때, 단원들이 지니고 있는 개개 악기의 제품과 특징은 열거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지휘자의 소개를 생략해 버리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축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개선되었지만 그 저변의 통념만은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지가 않다. 오늘날의 건축가는 중세의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과대평가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가게 앞 양철통 속에 청사진을 굽고 있는 '대서방'정도로 여겨져서도 곤란할 것이다.
이제 새로운 2000년대의 시작과 함께 건축서비스의 개방, 교육개방이라는 WTO의 거센 물결이 건축에 대한 전반적 인식의 대전환을 강요하고 있다. 여기에 대비하기 위해서 우선 건축이, 건축가가, 건축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구본덕(영남대 교수·건축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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