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까지 대구 서문시장은 서울 남대문, 동대문 시장에 이어 국내 3대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포목, 혼수, 주단, 액세서리, 아동복, 숙녀복 등의 분야는 전국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 국내 패션시장에 신기류가 조성되면서 상권에 큰 변화가 왔다.
나이키, 프로스펙스로 대표되는 이른바 국가브랜드(NB.National Brand)가 시장 파고들기에 나서 '메이커 무풍지대'였던 재래시장을 위협했다. 대형 백화점들이 속속 들어서 'NB'의 파괴력을 키웠다. 신원, 나산, 닥스, 엘지, 빈폴, 맨스타 등 낯설지 않은 NB들이 생활 깊숙이 파고 들었다.
NB가 서민들에게 '메이커 병'을 키우는 동안 재래시장은 '유사품 파는 곳', '허드레 물건 파는 곳', '바가지 씌우는 곳'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디자인, 바느질, 부자재 등에 종사했던 서문시장의 일꾼들이 상당수 NB업체로 흡수됐다. 나머지는 기술을 사장한 채 재래시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시장 변화 속에서 최근 서울 동대문시장이 바람을 몰고 왔다. 이른바 자체브랜드(PB.Private Brand)의 등장이다. 고품질 저가격 정책으로 패션시장 주도에 나섰다. 밀리오레의 성공이 그 좋은 예다.
그러나 대구 서문시장은 숙녀복 일부를 제외하고는 동대문시장에서 물건을 떼다파는 곳이 되고 말았다. 대구 섬유업계가 국내 원단 물량의 90%를 공급하면서도 유통시장은 80년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생산은 있지만 유통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블라우스 1점을 만드는데 필요한 원단은 2마(2천400원)다. 디자인, 봉제, 단추.컬러부착, 물류, 판매 등을 통해 소비자에겐 7만원에 판다. 대구에 남은 것은 원단 값, 최종 판매 마진밖에 없다. 6만원 가량을 외지에 넘겨주는 셈이다.
섬유도시 대구가 패션도시 대구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생산에 유통기능을 가미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밀라노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도 패션 유통시장을 개발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대구에서 생산한 원단을 여기서 디자인하고 박음질하며 외지로 보내야 지역 경제를 살찌울 수 있다. 고용 창출 뿐 아니라 판매가의 13~15%를 차지하는 물류비를 줄여 싼 값에 좋은 물건을 공급할 수 있다.
검단동 물류단지 의류관, 갤러리존, 밀라노존, 베네시움이 대구 패션시장에 변화를 재촉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물건을 대구에서 공급하지 못한다면 부가가치의 대부분을 외지에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원단-디자인-봉제-부자재-물류-판매-소비 등의 과정을 동시에 구축하는 패션산업은 어느 한 매듭을 푼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시책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패션산업 구축의 초점은 대구 자체를 '패션'이라는 국가브랜드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는 밀라노가 이탈리아의 한 도시임에도 세계 패션을 주도하는 이미지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구에는 여전히 숨은 바느질 일꾼과 언제라도 돌릴 수 있는 기계, 과거 수십년간 축적된 기술력이 있다. 패션관련 학과가 많아 훌륭한 디자이너도 육성할 수 있다.
남은 일은 이를 어떻게 원단생산과 연결시킬 것인가다. 브랜드 개발은 섬유산업이 패션산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PB로 출발한 이탈리아 밀라노가 국제적인 NB 보유도시로 성장했던 과정이 무엇이었는지 음미해봐야 할 때다.
全桂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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