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야국들은 왜 뭉치게 됐으며, 고령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대가야는 언제 어떻게 가야국들의 리더로 부상했을까? 5.6일 이틀간 '고고학을 통해 본 가야'를 주제로 열렸던 한국 고고학 전국대회(대구 계명대)에서, 경북대 박천수(고고인류학과) 교수가 이와 관련해 '무역권 독점론'을 재강조해 관심을 끌었다.
박교수의 정리에 따르면, 그 동안 문헌사학 쪽에서는 대가야권이 형성된 것은 470년 쯤 신라가 서북방 공략을 시작한데 대응하려 한 때문으로 파악해 온 반면, 고고학 쪽에서는 강을 따라 형성된 교역망에 의해 자연적으로 상호 의존도를 높여 왔던 것으로 생각해 왔다.
또 대가야권이 어떤 권력 구조를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문헌사학 쪽은 여러 가야국들이 상호 독립적이었다고 파악하는 반면, 고고학에서는 묘에 차이가 있는 점 등으로 미뤄 대가야 중심의 위계 질서가 있었다고 생각해 왔다는 것.
박교수의 견해는 그가 소개한 일반적인 고고학적 시각과 큰 궤를 같이 하면서도, 대가야의 우위 확보 이유를 '무역권 독점론'으로 보다 특수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됐다.
당초 가야국들은 일상적인 소규모 경제권 단위로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 있었고, 각 나라들 상호간에는 수장 연합 성격의 관계가 맺어져 있었다는 것이 논리의 출발점이다. 또 그때는 김해의 금관가야 세력이 맹주로 활약했다. 각 나라들의 경제권은 조그만 강들을 중심으로 한 수계(水界) 별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지만 5세기에 들어서면서 해당 수계 혹은 경제권을 넘어서는 나라가 나타난다. 그것이 고성을 중심권으로 하는 소가야. 다른 지역으로의 광역 무역을 개발해 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박교수에 따르면, 이 교역의 주도권은 5세기 후반 들면서 대가야로 넘어 간다. 이때 대가야는 고령.합천 등지의 야로지를 바탕으로 철을 많이 생산해 무역상의 우위성을 확보한 뒤, 활동 영역을 넓혀 남강 수계로 진출한다. 당시엔 남강이 내륙 교역의 회랑 비슷한 역할을 하던 중요한 통로였으며, 이 남강을 대가야가 차지함으로써, 대가야는 왜(倭)와 가야권은 물론, 백제와 왜 사이의 무역까지 장악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때 이후로는 일본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에서도 금관가야 것이 아닌 대가야 산물이 주류를 이루며, 일본 제품도 대가야권에서 발굴되기 시작한다. 대가야가 금관가야를 대신해 가야권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다. 마침 이때는 일본에서도 권력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 역시 대가야의 문물을 수입한 쪽에서 새로 주도권을 장악했기 때문일 수 있었다는 것이 박교수의 추정이다.
교역로 확보라는 필수불가결한 사안이 걸려 있는 한, 대가야 권역의 여러 가야국들은 연맹체가 아닌, 위계 질서가 뚜렷한 확실한 상하관계 아래에 있었으리라는 것도 덩달아 나오는 추론이다. 이는 묘제에서도 짚인다는 것. 이렇게 형성된 대가야권은 고령을 중심으로 합천.거창.함양.남원.구례.하동.장수 지역까지 뻗쳐 있다. 朴鍾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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