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공한 향토출신 재일동포들(13) 김종달 회장

관중들을 환호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지난 3월 청도 소싸움대회장. 관중석 한켠에서 조용히 미소짓는 한 노신사가 있었다. 재일동포 김종달(金鍾達.77)씨. 그는 일본 규슈(九州)지방에 26개의 방계회사를 거느린 '유고그룹' 총수로 한일 친선경기를 위해 일본의 싸움소들을 이끌고 고향을 찾았던 것이다.

국제대회로 성장한 청도 소싸움대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관중수도 늘어나 고유의 민속경기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 소싸움대회가 성사되기까지는 한 재일동포 독지가의 역할도 컸다.

김종달 회장은 이 행사를 국제적인 행사로 만들고 싶다는 김상순 청도군수의 요청을 쾌히 받아들이고 일본 가고시마(鹿兒島)투우협회 소속 우승소들을 이끌고 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또한 김회장은 이 일본의 검은 소들을 실어 나르는 비용과 조련사와 함께 청도에 머무르는 경비 등 약 6천500만원을 모두 부담했다.

김 회장을 만나기 위해 일본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시에서 열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인구 28만명의 소도시인 구루매(久留米)시를 찾았다. 그의 저택에는 소공원을 연상케하는 넓은 정원이 잘 가꿔져 있었다. 평생의 취미로 정원을 가꾸어온 김회장의 작품이었다. 그리운 고국산천의 모습을 옮겨온 모습들이다.

77세로 보기엔 너무나 당당한 체구의 김 회장은 올해가 일본으로 건너온지 꼭 60년이 된다며 말문을 열었다. 경북 청도군 각북면에서 태어나 17세가 되던 1939년 여름 4년간 가뭄이 계속돼 농사만으로는 살기가 어려워지자 광부 모집에 참여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야마가타(山形)현 신조탄광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는데 18세 이하는 일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 나이를 속이고 탄광으로 들어가 탄을 캐기 시작했다. 한번은 낙반사고가 일어났으나 침목 사이에 끼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허리를 다쳐 3개월간 입원하기도 했다. 결국 일을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 오사카(大阪)시에 있는 철공소에서 망치질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나이가 들어 징용 영장이 나왔으나 소집을 거부하고 나고야(名古屋)시로 달아나 또 다시 탄광일을 했다. 광부가 되면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남동생도 같이 와서 일을 시작했다. 나이가 어린 동생은 당시 우물 처럼 깊게 뚫린 수직갱에서 일하다 아래로 추락해 다리를 크게 다쳤다.

탄광일에 몸서리가 난 김씨는 산판에서 벌목공 일을 하기도 하다가 큰 돈을 벌기위해 대규모 밀도살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히게 되고 징용에 응하지 않았던 죄도 함께 겹쳐 15년 형을 받고 복역중 2년10개월만에 해방이 되자 풀려 나왔다.

"그 당시의 고생은 이루 말로 다 못합니다. 일본 경찰에게 받은 고문의 흔적은 아직도 턱과 손에 상처로 남아 있어요"

해방의 무드를 타고 모두가 그리운 고국으로 떠나고 있었으나 김씨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고 돈을 벌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깨엿을 만들어 파는 일을 시작하고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알루미늄 냄비, 유똥치마 등을 대량으로 구입해 한국 암시장에 공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년 수확이 끝나면 깨 원료를 구하지 못해 큰 수익이 못됐고 한국시장쪽도 풍랑으로 화물선이 전복돼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암거래와 밀무역 등의 혐의로 또다시 8개월을 복역하게 된다. 당시에는 지하경제의 물자 수급을 위해 암시장은 일반화돼 있었으나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새출발을 다짐한 그는 어느날 여관 한집을 통채로 빌린 뒤 자신의 재일동포 친구 30명을 초청해 이틀간 파티를 벌였다. 마지막날 그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친구들의 협조를 청했다. 그뒤 자신의 계좌에는 친구들로부터 십시일반 모인 약 900만엔의 자금이 모였다. 그는 파친코 기계 30대를 구입해 후지산 부근 시즈오카(靜岡)시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순풍에 날개 돋친 듯 영업을 번창했고 그 수익금으로 짧은 기간에 친구들의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오락시설이 별로 없던 당시에 중소도시에서 오락기기 업종을 시작한다는 그의 예상이 주효한 것이다. 이러한 업종에는 언제나 따르는 불량배들의 텃세는 그를 괴롭혔다. 산전수전을 겪은 그는 이들과 격투를 벌이기도 했다. 혼자서 30여명을 상대하며 철로변에서 싸움을 벌여 열차가 정거하는 사태도 있었다.이런 갈등속에 영업을 확장해온 그는 중소도시에 분점을 내기 시작했고 그는 영업소 위치 선택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한군데의 길목에 눈길을 두면 약 일주일간 시장조사를 하며 감을 잡는 다고 한다. 이 처럼 그의 사업은 눈덩이 처럼 성장했다.

그는 장남에게 사장자리를 물려주고 경영의 현대화를 기했다. 지금은 업종을 다양화하여 호텔과 레저산업으로는 규슈 일대에서 유고그룹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고 지난해까지 구루메시의 개인소득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해방 후 얼마동안은 조총련에 소속돼 있었다. 한번은 북한을 방문하고 그들의 실상을 알고 대판 싸움을 벌인 뒤 귀국해 민단으로 돌아왔다. 88서울올림픽기금으로 1억원을 희사한 그는 자신의 모친 장례식때 한국식 상복을 입고 5일장을 치렀다. 이때는 문상객으로 모인 재일동포들은 민단, 조총련 구별없이 만남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찾은 필자에게 일본 정종을 권하며 죽기전에 고국에서 찾고싶은 한사람이 있다고 털어놨다. 젊은 시절 여러가지 사정으로 경주에서 피신생활을 할때 그를 정성으로 도와준 사람인데 살아있다면 지금은 약 60여세가 됐을 신모씨를 찾는다며 꼭 은혜를 갚고 싶다고했다.

한때 한국에서 공해방지 시설관련 회사를 차린다고 40억엔을 투자하고도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고국은 언제나 그리운 곳이라는 그는 청도군 각북면 부근에 묘자리도 잡아두고 있다. 그의 이런 고향 사랑은 지금까지 약 10억여원의 금액을 청도군 발전을 위해 내놓았었다.

그는 지난 청도 소싸움 축제때 직접 자신의 이름과 그룹명을 따서 종달호와 유고호라는 이름을 붙인 소를 출전시키고 응원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이제 문화관광축제로 지정된 내년 청도 소싸움 축제에도 참가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朴淳國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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