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를 가름할 수 없는 한낮의 육탄전. 쏘고 찌르고 후리며 총검의 쇠붙이가 맞부딪쳐 불꽃이 튈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쏟아졌다. 적병과 뒤엉켜 사투를 벌이던 이정실 중위(당시 15연대 1대대 3중대장)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체구가 큰 인민군 병사가 허리에 감긴 채 숨을 거둔 상태였다.
시체에서 벗어나려고 버둥대는 순간 '땅'하는 총소리와 함께 왼쪽 전투복 바지가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으며 삭신을 저미는 고통이 온몸을 엄습해 왔다. "여기서 죽는구나…" 순간 이 중위는 고향의 아버지와 누이동생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누구나 그랬다. 국군이고 인민군이고…. 낯설은 산 이름모를 고지에 쓰러진 장병들은 자욱한 포연속에,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두고 온 고향과 가족들을 떠올렸다.시산혈하(屍山血河), 328 고지의 비극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왜관 북쪽 6km 지점의 이름없는 민둥산(당시에는 300고지로 불렀다). 1사단 15연대 1대대가 방어선을 편 13일부터 보름간 사단 좌일선의 요충지였던 이 고지에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주인이 뒤바뀌며 헤아릴 수도 없는 꽃다운 목숨들이 가뭇없이 사라져 갔다.
"120명이던 중대병력이 3일만에 절반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고지를 향해 진격할 때면 빗발치는 총탄에 지는 솔잎이 마치 함박눈 내리듯 했어요" 이씨(78·특8기·중령예편·경기도 고양시)는 고지 주변에는 섭씨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으로 풍선같이 부풀어 오른 시체의 배가 '펑'하고 터지는 바람에 신병들이 놀란 토끼처럼 몸을 움츠렸다고 덧붙인다.
"328 고지를 빼앗기면 사단의 후방 보급로가 차단되고 다부동 전선이 뚫린다. 그러면 대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부산교두보가 무너진다. 갈 때라곤 현해탄뿐이다" 백선엽(白善燁) 사단장과 최영희(崔榮喜) 연대장은 '무조건 사수'를 명령했다.
상대는 전쟁발발 3일만에 서울을 점령, 김일성으로부터 '서울사단'이란 호칭을 받은 인민군 최정예 3사단이었다. '8·15 광복절까지 대구를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촉으로 인민군의 공세도 필사적이었다.
수류탄만 든 선두 돌격대 뒤에는 다발총으로 무장한 독전대가 무자비하게 몰아치며 파상공세를 거듭해 왔다. 죽음의 돌격전이 무려 10여회씩이나 되풀이 되면서 수류탄이 바닥나고 백병전으로 이어진 고지는 연일 시체로 뒤덮혔다.
"사상자가 하루에도 수백명이 넘었습니다. 포탄에 맞아 창자가 비어져 나온 배를 쓸어안고 '제발 빨리 죽여달라'고 울부짖던 병사들의 비명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15연대 위생병이었던 이경식(68·학도병·전북 부안)씨는 밤낮없는 격전으로 선혈이 낭자한 시체더미 속에서는 부상당한 아군과 인민군 병사들의 흐느낌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전한다.
16일 낮 낙동강 건너 왜관 서부지역에 대한 융단폭격으로 잠시 주춤했던 적의 공격은 20일을 넘기면서 막바지 총공세로 돌변했다. "만세 만세" 소리와 함께 수백여정의 다발총이 동시에 불을 뿜을 때는 제트기가 귓전을 스치는 듯한 소름 끼치는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신병들은 무기도 챙기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쓰러졌다.
전우의 주검조차 수습할 겨를이 없는 돌격전과 백병전. 328 고지는 무려 16차례에 걸친 고지 쟁탈전 만으로도 한국전쟁사상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포탄이 작열할 때마다 시체더미가 다시 박살이 나고, 썩은 살덩이가 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328 고지에는 유골조차 온전한 게 없어요" 유해발굴 증언을 위해 고지를 찾았던 황대형(70·당시 3중대 일등중사·광주시 거주)씨는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낮이면 허기진 배와 타는 갈증을 건빵 2개에 풋사과 한입으로 때우고, 밤이 되면 해어진 전투복 구멍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모기떼에 시달리면서 처참한 죽음앞에 떨곤 했다는 게 참전자들의 얘기다.
328 고지 부근 망정1리 주민들도 그때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유화목(70)씨는 무태로 피난갔다 돌아오니 악취를 견딜 수가 없어 마을사람들과 함께 시체를 묻으러 나갔다고 한다. "앞산 골짜기마다 겹겹이 쌓인 시체더미를 어떻게 손댈 수가 있어야지. 어림잡아 2천구는 됐을거요 아마…. 에이 몹쓸놈의 전쟁…"
-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낙동강 방어선은?
'낙동강 방어선'은 부산을 기지로 총반격을 시도하기 위한 교두보란 의미에서 '부산교두보'라고도 하며, 미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이 설정한 최후 방어선이란 뜻에서 '워커라인(Walker line)'이라고도 부른다.
워커 사령관은 최초 낙동강 방어선을 X선, 최후 저지선을 Y선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X선은 남쪽 마산에서 남지~왜관~낙정리~영덕을 잇는 동서 80km·남북 160km로 총 240km에 달하는 구간이며, Y선은 왜관을 축으로 남으로는 낙동강 동으로는 포항에 이르는 방어선이다.
Y선은 대구와 부산을 포함한 전국토의 8%를 겨우 지탱하고 있는 배수진으로 전선의 어느 일부만 돌파되어도 곧 전체 방어선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방어대형이었다.
국군 제1군단(8사단·수도사단)과 제2군단(1사단·6사단)에 낙동강 최초 방어선(X선) 철수 명령이 하달된 것은 8월3일. 다시 방어선 축소에 따라 최후 저지선(Y선)으로 이동한 것은 12일이다.
전사(戰史)는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는 동안 국군은 개전초 병력의 70%에 해당하는 7만여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인민군은 32%에 달하는 5만8천여명의 병력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다부동 지역의 국군 1사단이 맡은 주저항선은 328고지~숲데미산(519m)~유학산(839m )~741 고지를 잇는 20km의 구간으로, 여기서 대구까지는 불과 25km의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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