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포항 용화사 한법련 스님-산골 비구니의 '6·25망부가'

모두들 잊어가는 한국전쟁. 그러나 그때 스물다섯 청상과부가 돼야 했던 한 여인은 남편이 죽은 그 터에서 망부가를 50년간 불렀다. 그리고 이제 머리 깎고 속연을 끊었다.

포항시 기계면 화대리 비학산 동쪽 자락 용화사(龍華寺). 그 입구엔 보통 절에서 흔히 만나는 불탑 대신 위령탑이 서 있다. '여기 한덩이 돌에 민족의 한을 새기나니, 영령들이시여, 불멸의 구국용사 되시어 고이 잠드소서… 못다핀 학도병, 무명용사들이여, 한송이 연화(蓮花)로 환생하소서…'

절터는 바로 그 무덥던 한국전쟁 첫해 여름의 격전지. 절을 지키고 있는 한법련(韓法蓮·75·속명 한연호) 스님의 비통한 인연이 위령탑에 묻혀 있다.

스님이 국군 수도사단 18연대 중대장이었던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접한 것은 1950년 가을.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상주 시집으로 막 돌아왔을 때였다. "흥이가 전사했네…" 전투복 차림으로 들어선 시삼촌(권준·그 후 50사단장 역임)의 말에 자지러져야 했던 스님의 그때 나이는 겨우 스물다섯. 인민군의 막바지 공세가 안강을 위협하던 8월23일에 남편 권태흥(權泰興·육사9기) 대위가 전사한 것이었다.

남편이 남기고 간 두 아들을 위해 모진 마음을 먹었다. 그럭저럭 15년. 상주 보훈청에 근무하며 생활을 꾸려 가던 스님에게 전쟁은 또한번 날벼락을 쳤다. 월남전에 나갔던 큰아들(당시 20세)이 실성해 돌아온 것.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서울로 올라 갔습니다. 백약이 소용 없었습니다. 새벽기도 드리던 어느날, 남편이 꿈속에 나타났지요. 어딘지도 모르는 비학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무작정 열차·버스 갈아타고 내린 곳이 생면강산의 기계였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가며 움집에 생솔가지 덮고 살았다. 그리고는 남편의 현몽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지금 절이 자리잡은 자리가 바로 남편이 전사한 터. 그리고 다시 30년 세월. 남편을 추모하고 아들의 쾌유를 빌며 홀로 지내다 1983년에 상주 선산에 잠들어 있던 남편의 유해를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 했다.

"이제 내 할 도리를 다한 것 같았습니다. 미련도 회한도 다 떨쳐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키로 했지요" 4년 전, 대웅전 아래 쪽에 위령탑을 건립한 뒤, 50년 '전쟁 청상'은 칠순의 나이에 머리를 깎았다. 이제 용서하고 잊고 버리고 가자는 뜻일까?현충일인 6일 오전 이 절에서는 군 의장대가 도열한 가운데 조촐한 추모제가 열린다. 비학산을 울리는 조포(弔砲)는 이곳에서 50년 전 산화한 젊은 넋들의 극락왕생을, 그리고 한 전쟁 미망인의 성불(成佛)을 기원할 것이다.

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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