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성가장 가정

"목욕탕에 한번 가봤으면 좋겠어요"초등학교 2학년인 명진이의 소원은 대중목욕탕에 가보는 것. 또래 사내아이들 같으면 아빠 손에 이끌려 목욕탕에 가는 게 되레 귀찮은 일이지만, 명진이에겐 그런 아이들이 부럽기만 하다.

요즘은 엄마 김선영(35·대구시 비산동)씨의 마음도 한결 가볍다. 날씨가 더워 수돗가에서 명진이를 발가벗겨 씻겨도 감기 들 염려가 없기 때문.

그러나 벌써부터 올 겨울이 걱정된다. 변변찮은 사글세방에 난방이 잘 되는 목욕탕이 따로 있을리 만무. 여탕에 데려갈 수도 없어 대야에 더운 물을 받아 급히 씻겨도 감기에 걸리기 일쑤인 명진이. 이번 겨울엔 옆집 아저씨에게 부탁해볼까….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는 김씨에겐 사내 아이를 목욕탕에 데려가 씻겨주는 남자 자원봉사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여성가장'. 이혼·사별 등으로 남편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이들에게 그처럼 처절하게 다가오는 삶의 고민이 또 있을까? 이혼율이 높고 암 등 악성 질병으로 20, 30대 사망률도 높다지만, 예기치 않게 여성가장이 돼버린 이들이 헤쳐 나가야 할 벽은 높기만 하다.

그래도 남편과 사별한 여성은 처지가 나은 편. 대부분 친정에서 따뜻하게 받아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한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가장 가까운 친정 어머니마저 이혼한 딸을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 체면상 이웃 친지에게 이혼사실을 못 밝히고 눈치가 보여 친정에 눌러앉을 수도 없는 여성가장들은 점점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외톨이가 되기 일쑤.

"한번 해보자"는 당찬 각오로 아이와 함께 독립해 보지만, 산다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결혼때 직장도 그만 뒀고 전문 기술도 없는 주부가 변변한 일자리를 새로 찾기는 어려운 일. 기껏해야 공공근로, 파출부, 식당, 공장 등 허드렛일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밤낮으로 일에 매달리다 보면 2, 3년도 안돼 온 몸에 골병이 들기 마련. 온종일 집을 비워야 하는 엄마때문에 하루를 보내야 하는 아이는 어느순간 문제아로 변해 있곤 한다.

자녀가 어린 여성가장들 경우는 일자리를 갖고 싶어도 마땅히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문제. 시간제 일을 하며 버티다 힘들어 경제적 도움이라도 받을 양으로 자활보호 신청을 해도 "엄마가 젊고 애가 하나라서 안된다"며 퇴짜를 맞곤 한다.

이혼 당시 전 남편이 아이의 양육비를 책임지도록 결정이 나도 실제로 양육비를 받는 여성은 그리 많지 않은 실정.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성가장 이모(33·대구시 감삼동)씨. "날마다 남편으로부터 매 맞고 살다 참다 못해 이혼했습니다. 법원에서 양육비 지급 판결이 났지만 전 남편은 처음 한번만 주고 그 다음부턴 직접 만나서 주겠다며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남편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운데 어떻게 합니까?"

폭력·도박 등을 일삼는 전 남편을 믿지 못해 아이를 떠맡았지만 너무 힘들어 아이를 안고 엉엉 울기 일쑤인 여성가장들. 그래도 이들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 또한 아이들이다.

"아파서 누워있는데 다섯살난 아이가 축축한 물걸레를 들고 와선 이마에 얹어주더군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아이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여성가장 박영숙(31·대구시 침산동)씨는 힘들다가도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절망감이 없어진다며 환히 웃는다.

일상속에 꼭꼭 숨어 지내던 여성가장들이 '여성가장연대'(053-425-7701)라는 모임을 만들어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년여전 '함께 하는 주부모임'의 '들풀 이야기방' 모임에서 만나 어려움을 나누던 여성가장들이 한부모가정도 정상적인 가정임을 떳떳이 밝히고 사회의 왜곡된 시선을 바로 잡아보고자 힘을 모은 것.이들이 만드는 소식지에는 아빠와 함께 하는 캠프는 왜 그리 많은지, 신학기때 선생님이 "아빠없는 사람 손들어" 하는 말에 풀이 죽은 아이 모습 등 여성가장들의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담겨있다. 지난 18일 아이들 손을 잡고 팔공산 등지로 역사·자연 생태기행을 다녀온 이들은 여성가장들의 사는 모습을 담은 작은 책자도 펴낼 계획.

'여성가장연대'의 모임장인 박진형(46)씨는 "많은 여성가장들이 모임에 나오면서 표정이 밝아졌다"며, "우리들의 아이들이 결손가정의 문제아가 아니라 사회의 희망찬 일꾼이 되도록 디딤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金英修기자 stella@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