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특별기고-내가 본 6·25(엄창석-소설가)

6·25가 끝나고 십여년 쯤 지나 태어난 나는 6·25를 잘 알수 없다. 게다가 우리의 기억이란 대개 열살쯤에서 시작되느니 만큼 실제로 6·25는 내게서 20년가량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다.

어린 시절 가장 흔해빠진 표어들 중에 '상기하자 6·25'라는 것이 있다. 6·25에 대해 상기할 것도 없는데 끊임없이 상기해보란 것이다. 대다수 사회적 규범들이 그렇듯 사안의 본말을 따져보기도 전에 우리 속에 깊숙이 각인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6·25 역시 '상기'의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우리들은 마치 뼈저린 경험을 했는 양 해마다 '상기'의 의식을 치르곤 했던 것이다.

사실 내게 있어서 6·25의 경험은 아버지를 통해서 왔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서 6·25를 생생히 상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사회적 규범인 '북한 오랑캐'에 대한 '상기'가 전혀 아니었다. 아버지의 의식을 아주 불편하게 만들었던, 혹은 기형적으로 비틀었던 우리 쪽에 대한 상기였다.

아버지는 민간병에 참여 못한 결정적인 죄를 안고 있었다. 당시 스무살의 아버지는 양친을 잃고 혼자서 다섯살부터 열 두어살까지의 어린 동생 넷을 데리고 피란 중이었다. 피란 중이던 젊은 남자들은 당장 전장으로 옮겨졌는데 아버지는 그만 코흘리개 동생들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이후 아버지는 숱하게 경찰서를 들락거리게 되었다. 당시 국민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수업중에도 수시로 불려나가곤 했다고 한다. 젊은 날의 고통스러움 때문에 얼마만한 과장이 끼어들었는지 모르나, 1980년 연좌제가 폐지되었을 때 아버지의 기뻐하시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자기 때문에 동생들과 자식들의 앞날이 늘 염려되었던 까닭이다.

물론 지금도 아버지의 의식 한켠에는 그때의 두려움이 못처럼 박혀있다. 80년대 한창 정치적인 바람이 불던 시기, 대학생인 우리 형제들을 모아놓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무슨 당(黨)이든지, 여하간에 당에는 들어가지 마라. 하지만 성인이 된 나는 종종 아버지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 그때 정말 잘 선택하셨습니다. 저라고 해도 전장보다 코흘리개 동생들을 택했을 겁니다. 그게 인간이고, 멀리 보면 사회를 평탄하게 흐르도록 하는 힘입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참혹스러움을 모르는 탓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핏덩이같은 생명보다 공동체의 안위가 더 중요한 건지도 알 수 없다하여간 '상기하자 6·25'는 내게 북한 오랑캐에 대한 상기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내가 이렇듯 아마도 우리의 세대들은 자기 나름의 6·25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회적 규범과 강요가 어떠하든 기억의 동질성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은 다양한 의식구조를 거느리게 마련이다.

6·25의 2세대인 우리에 비해서는 3세대인 지금의 초등학생들에겐 '상기하자 6·25'는 낯설다 못해 아주 괴이쩍은 문구일지 모른다. 6·25는 저들에게 상기의 대상이 아니라 기껏 역사책의 한대목으로 느껴질 것만 같다. 6·25가 역사책으로 넘어가버리면 포탄과 피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수일 전 김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것이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보도됐을때 초등학생들 사이에 '반갑습네다'하는 북쪽 인사말이 유행했다지 않은가. 또한 젊은 소비자들을 겨냥해서 사업가들이 북한 음식점, 북한용품점들을 분주히 계획하고 있고. '상기하자…'와 '반갑습네다'사이에 끼인 우리 세대들은 어디다 눈을 돌려야 할지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상기하자…'가 권력의 산물이라면 '반갑습네다'는 보다 인간적인 것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인간적인 것은 권력적인 것보다 생명력이 길다는 사실이다.

나의 아버지가 전장보다 코흘리개 동생들을 택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 인간적 판단때문이라면 세대를 갈라놓고 땅을 갈라놓은 저 6·25의 깊은 웅덩이도 인간다운 판단과 감성으로 인해 다시 덮여질 날이 오고 말 것이다. 요즘들어 '남남통일'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의 의식속에 분단구조 대신 인간다움이 놓여진다면 여러가지 사회문제의 단층들은 물론이거니와 남북의 장막도 더 빨리 걷혀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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