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길 나의 삶-사회사업가 김진태씨

"아이구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데…저를 취재하겠다고 하니, 참…"

지난 1일 그의 집으로 들어서자 막 머리를 감고 나온 김진태(46)씨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사람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전에도 매스컴에 소개된 적이 있다며 취재 대상이 된 것을 거듭 부끄러워하는 듯 했다. 그의 말이 인사치레가 아니어서 잠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당신이 하는 일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중한 일이며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심정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면 이 사회를 더 아름답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는 약간 포장해서 말한다면 사회봉사에 힘쓰는 '사회사업가'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소외된 청소년들과 함께 사는 데 행복을 느끼고 그들로부터 '삼촌' '진태 삼촌'으로 불리는 평범한 야간업소 악사이다. 그는 왜 부모를 잃거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고, 한때 그릇된 길로 갔던 청소년들과 사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걸까? 평범한 이들이 '과연 훌륭한 일!'이라 하면서도 선뜻 실천하지 않는 궂은 일을 하며 남다른 삶을 사는 걸까?

대구의 평범한 가정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별 걱정없이 자라던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 가계가 급격히 기울면서 중학 진학이 막히는 아픔을 맛봤다. 생의 첫 난관이었다. 그는 신문배달로 고학하며 검정고시로 중학과정을 마쳤다. 고등학교는 정상적으로 진학했으나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로 고학하는 생활은 계속됐다. 그러나 별 불만을 갖지 않고 현실에 적응해 열심히 살아가는 모범생이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타연주에 취미를 붙이며 이른 나이에 맛본 생의 고달픔을 잊어나갔다.

전문대 건축과 진학후엔 취미생활이던 기타 연주를 활용, 아르바이트로 밤업소에 나갔다. 등록금을 해결하고 남는 돈은 업소의 여종업원들과 함께 양로원이나 보육원을 방문,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썼다. 1970년대 당시로서는 평범한 이들이 남을 돕는 일 자체가 흔치 않았고, 그 자신도 어려운 처지에서 남을 도왔다니 기자로서는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는 그런 눈치를 챈 듯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학비 마련을 위해 한 일로 남은 돈은 내 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선선한 말투였지만 별다른 생각이다. 사실 그는 그때부터 주위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후 한때 건축기사로 일하기도 했으나 아르바이트하던 야간업소 악사생활을 본업으로 삼기로 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선 더 많은 수익이 필요했기 때문. 의성의 한 야간업소에서 일하게 됐다. 시간이 남는 낮엔 그 곳의 보육원을 방문, 원생들과 지내면서 5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보육원측이 보육원내에 아예 그의 숙소를 마련해 줄 정도로 신뢰를 얻고 원생들과 정도 들어 평생을 보낼까도 생각했으나 그는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좀 더 체계적으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87년 자원봉사자로 소년원 도덕교육을 맡으면서 비행청소년들이 출소 후 갈 곳이 없어 다시 범죄의 늪에 빠지는 현실을 목격했다. 이듬해 자신이 사는 공간에 오갈데 없는 청소년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이 집은 '작은 등불의 집'으로 통하게 됐다. 지금까지 270여명의 청소년들이 이 집을 거쳐갔으며 지금은 14명의 10대들과 함께 살고 있다. 모두 남자청소년들이다. 관리 등의 현실적 문제 때문이다.

좁은 공간에 부대껴 사는 것도 쉽지 않았고 더구나 집주인들이 꺼려 집을 구하는데 서러움을 많이 겪었다. 지금은 독지가인 한 사업가가 대구 달서구 상인동에 마련해준 44평의 주택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업체가 경영난으로 건축비용의 절반만 부담, 1억8천만원의 부채를 떠안게 돼 월 이자만 125만원을 지급해야 하는 형편이 됐다.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가야할 처지여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부서지기 쉬운 유리처럼 자칫 잘못되기 쉬운 아이들을 위해 그는 공부 이외에 복싱, 컴퓨터, 풍물놀이 등 관심쏟을 대상을 마련해주는 데 골몰했다. 그러나 이를 싫어해 집을 뛰쳐나가는가 하면 거리 생활의 유혹을 떨치지 못해 가출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이 집을 거쳐간 아이들의 20% 가량은 단 며칠, 혹은 수개월만에 집을 나갔다. 아이들이 가출하면 그는 찾아나섰다. 경남 충무에서 강원도 양양의 철책선 부근까지 아이들을 찾기 위해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고 대부분 그들을 찾아내 집으로 데리고 왔다. 가출한 아이 찾는 데 용하다(?)는 소문이 나는 바람에 성서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던 형사들이 찾아와 도움을 구할 정도였다.

이렇게 아이들과 부대끼며 정을 쌓아온 지 12년여.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성년으로 자라난 아이들 중에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이들이 있는가 하면 건축기사, 차량정비기사 등으로 성실하게 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아직도 독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남자 홀몸으로 소외된 10대들의 아버지·어머니·삼촌노릇까지 해야 하는 고단함 속에서도 이 길이 자신의 길이라 여겨왔다. 내적 평화를 터득한 것일까. '작은 등불의 집'의 후원자들도 "10여년간 진태삼촌을 지켜봤지만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인으로 자라난 아이들이 열심히 사는 걸 보는 것도 보람이지만 그냥 이 아이들하고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내겐 행복입니다. 우습겠지만 함께 사는 아이들의 수가 적어지면 쓸쓸함을 느낄 지경이니까요"

그는 현재의 보육원제도가 오갈데 없는 청소년들을 수용하는 데만 급급,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는데는 소홀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는 천상 길 잃은 청소년들의 '작은 등불'인가보다. -金知奭기자 jiseok@imaeil.com

---작은 등불의 집

'작은 등불의 집'

서정적인 멋스러움과 함께 어딘지 애틋함마저 불러일으키는 이 집의 이름은 김진태씨와 그를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는 14명의 청소년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다.

기타를 치다 전자오르간 연주자로 바꿔 밤업소에서 일하는 김씨는 밤늦게 일을 마치지만 새벽5시30분이면 일어나 식사준비를 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가는 아이들, 공장에 가는 아이들을 시간대에 맞춰 차례로 깨우고 밥을 먹인 후 내보낸다.김씨는 일주일에 4, 5차례 소년원 등지로 청소년 강연과 상담을 나가는 한편 슬하의 7명으로 구성된 풍물놀이패 '등불패'의 매니저 역할을 하느라 바쁘다. 지난 95년 결성된 '등불패'는 전국 정상급의 실력을 자랑한다. 전국신라국악대전 최우수상(1998년), 세계사물놀이 한마당 버금상(2등, 1999년)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7월 이후엔 중국·일본·폴란드 등지의 해외 연주 일정도 잡혀 있다. 나머지 아이들도 컴퓨터·복싱 등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한자리에 모여 저마다의 이야기로 정을 나누며 미래의 불을 지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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