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의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갑옷으로 무장한 말을 탄 기병들. 광활한 만주 벌판을 지나 중앙아시아까지 내달린다. 보병들은 눈 내리는 겨울 전투에 대비해 전투화에 징을 박았다. 세계 최초로 아이젠을 사용한 고구려 군대. 한편으론 조공을 바치려는 이민족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아! 고구려. 얼마나 감격스런 이름인가.
매일신문 취재팀은 그 때는 우리 땅, 지금은 중국 땅에서 고구려를 찾아 나섰다. 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 등 중국 동북3성 일대에 흩어져 있는 우리 조상들의 찬란한 유적들이 '대왕국 고구려' 역사를 땅위에서, 땅속에서 기록하고 있었다.
▨고구려 제1대 추모왕
고구려를 건국한 임금 추모왕(BC37~19년). 우리가 흔히 아는 동명성왕은 부여의 시조. 고구려의 어느 시점인가부터 추모왕과 동명왕이 같은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다. 삼국사기도 동명왕과 추모왕을 같은 사람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이복규 강원대 교수는 "고구려 시조는 추모왕으로 학계에서 이 부분에 대한 정리는 이미 끝난 상태"라고 말했다. 어릴 때 활을 잘 쏴 주몽(朱夢)이란 이름을 얻었다. 사진은 중국 집안 박물관에 소장된 고구려 역대왕들의 상상화다.
졸본(卒本)으로 불렸던 고구려의 첫 수도 환인(桓仁). 그 중에서도 우리의 최대 관심은 오녀산성(五女山城)에 집중됐다. 신비로움을 간직한 고구려인의 성도(聖都)였기에 중국이 오래도록 공개를 꺼리다 올해부터 개방한 도읍지. 이전에 외국인이 이곳을 찾고자 할 때는 관광국이 아닌 공안당국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곳을 취재한 한국 언론으로는 매일신문이 처음이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해발 820m 절벽 위 산꼭대기에 추모(鄒牟)왕이 궁궐을 짓고 고구려의 역사를 시작했다.
환인시내를 바라보며 낭떠러지에 섰을 때는 오금이 저렸다. 적군이 침입할 수가 없어 보였다. 성밑에서 보기에는 규모가 턱없이 작아 무슨 궁궐이 저곳에 있었겠냐 싶었는데 막상 올라가서 보니 상상을 초월했다. 성내부는 동서 길이 300m, 남북 길이 1천500m.
삼국사기에는 추모왕이 추격해 오는 북부여의 군사를 피해 물고기와 거북이들의 도움으로 비류수(지금의 혼강, 渾江)를 건너 졸본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오녀산성은 3면이 절벽이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만든 성벽은 동남쪽에 집중돼 있다. 60년대에만 해도 1천400m가 넘었으나 현재는 200~250m 정도 남아 있는 상태.
이 성벽에 사용된 돌들은 오녀산성이 있는 곳의 돌 재질과 다르다고 한다. 우리를 안내한 중국 안내인은 "이 많은 돌들을 강 건너로부터 순조롭게 옮기기 위해 추모왕은 바람을 이용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고 말했다. 고구려 건국신화를 기록한 '동명왕편'에는 원래 추모왕은 '하늘의 아들인 해모수의 아들'이고 '물을 다스리는 하백의 외손자'로 기록돼 있다. 바람과 물을 자유자재로 다스렸다는 증거다.성위로 올라가는 길은 현재로선 서문이 유일하다. 최근 관광객을 위한 리프트를 만들었는데 길이가 450m. 경사가 몹시 급해 웬만한 담력으로는 타기가 어렵다.
궁궐터는 현재 축대만 약간 남아 있다. 궁성의 가로 길이는 40m 정도.
그런데 이 궁궐에서 역성(易姓)혁명이 일어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이 무혈인지, 유혈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추모왕의 아들이 아닌 사람(유리왕,琉璃王)이 왕위를 이었다. 추모왕은 고(高)씨, 유리왕은 해(解)씨다. 추모왕의 아들 온조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자 한반도로 가 백제의 시조가 된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추모왕이 왕의 자리에 있는 것을 즐거워 하지 않아 40세 때 용을 타고 승천한 뒤 유리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돼 있다. 당시 부족국가들의 경우 세력이 강한 부족에게 왕권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 체계를 정비한 고구려는 6대 태조왕 때부터 다시 고씨가 왕위를 이어간다.
만약 유혈혁명이 일어났다면 이 궁궐과 궁궐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병사들의 숙영지에서 전투가 일어났으리라. 숙영지에서는 갑옷, 화살촉들이 대거 발견됐다.
성을 축성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실 물이 있느냐는 것. 이곳에는 깊이 2m, 가로 7m, 세로 4m의 천지(天池)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전에는 가로 길이가 12m나 됐다고 한다. 환인시내에서 올려다보면 완전히 바위로 된 성인데 어떻게 이런 거대한 샘물이 사철내내 마르지 않고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가로 20m 세로 8m인 바위터는 식량 저장창고로 추정되는 곳이다. 튼튼한 대형 바위 위에 나무를 쌓고 그 위에 양식을 올려 습기가 차지 않게 했다. 옛 선조들의 지혜가 그대로 드러난다.
요녕성 정부는 이곳을 관광지로 집중 개발키로 했다. 한국 관광객들을 겨냥해서다.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중국과 경쟁했는데 그 때의 유적이 오늘날 중국인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는 이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글 : 崔正岩 jeongam@imaeil.com
사진 : 金泰亨 기자 thki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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