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1935년 15세의 나이로 시를 습작하기 시작해 이듬해 고향을 떠나 상경한다. 첫 유학길인 셈이다. 상경후 오일도시인이 경영하던 '시원사(詩苑社)'에 머물면서 '일월서방(日月書房)'을 열고 본격 작품활동에 들어간다.
1939년 '문장'지에 승무 등을 추천 받아 등단하고 42년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작업에 연루돼 검거, 낙향후 해방까지 청년회를 조직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는 우리 글과 문학을 새로이 세우는 작업에 열중하다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청록파를 낳게하는 3인 시집 '청록집'을 발간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그에게 고통을 주는 병을 향해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병에게 中)라고 노래하는 달관을 보이고 있다. 그는 1968년 5월 17일 기관지 질환으로 세상과의 인연을 접고 경기도 양주군 마성리에 누웠다.
지훈의 형 세림 조동진. 일찍이 '꽃탑'과 '소년회'를 결성 동요와 동시를 창작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시속에는 고향 주실마을과 서울을 오가는 식민시대 젊은이들의 방황을 잘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 '조그만 보따리 큰 뜻을 품고/ 동구숲 떠나온' (향수1 中), '불야성 밝은 불빛을 피해서/ 으슥한 성터를 헤매는 마음'(향수2 中)의 안식처는 언제나 고향 주실마을 이었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이육사의 '절정'에 버금가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 '실춘보'는 영양읍 동부리 불미골의 애환을 노래하고 있다.
주실마을 동구밖. 고목들이 하늘을 찌르고 낙엽이 발목을 덮는 동산(洞山) 숲속에 마주선 두사람의 시비(詩碑)는 이들 형제의 고뇌와 문향(文香)이 고스란히 배어나 끊임없이 찾는 후학들과 글담을 나누고 있다.
이들 형제의 작품활동을 이끌었던 맏형 오일도(吳一島) 시인. 영양읍내와 인근한 감천리 입구 국도 한켠 숲속에 서있는 일도시비에는 단풍잎이 흩날려 내리고 있었다.
감천마을 안의 생가는 44칸의 웅장한 기와집. 국운헌(菊雲軒) 현판이 걸린 툇마루에 올라 강을 바라보고 있자면 마흔 여섯 단명시인의 정서가 애절히 다가온다. 천석거부의 영화가 사라진 낡은 고옥, 행랑뜰에는 시인이 밤마다 지조와 저항을 곱씹으며 어루만졌던 감나무가 외롭게 섰다.
1901년 영양읍 감천리 낙안인(人) 오익휴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1930년대 후반 사재를 털어 순수 시잡지 '시원(詩苑)'을 창간, 신시의 방향을 정립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당시 모란꽃 같이 화사했던 시문학파들의 시에 비해 그의 시는 일정한 시조에 들지 못한채 항상 변방을 맴돌았다.
'시원(詩苑)은'오일도시인 필생의 사업으로 다양한 쟝르와 해외문학, 평론 등을 실으며 당대 시문학의 새로운 활력을 불러 넣고 한국시문학의 기틀을 새롭게 잡고자 했으나 재정난에 부딪혀 5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한다.
이후 시인은 서울생활 10년을 마감하고 낙향하게 된다. 서울생활은 그에게 심한 신경쇠약과 함께 암울한 시대적 비애를 남겼고 술로 나날을 달래는 일상의 단초를 남겼다. 시원 창간호에 발표한 노변애가(爐邊哀歌)는 시인으로서 일도의 자리를 확고히 해준 작품이지만 그의 처절한 고독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고요한 노변에 홀로 눈 감으니/ 꿈속같이 아득한 옛날 오 나의 사랑아/ 너의 유방에서 추방된지 내 이미 오래다' 이 시에서 시인은 벌써 자신의 죽음과 고독, 절망을 얘기했다.
소박한 시풍으로 당대 시문학파 한켠에서 고독을 노래했던 오일도. 그는 시원사를 통해 지역 후배문인들의 역량을 키워준 영양문학의 맏형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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