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거리의 화가 정경상씨

거리의 화가 정경상(40)씨를 만난 건 대구 시내의 한 서점 귀퉁이에서였다. 그는 서점 풍경을 스케치 하던 중이었다. 컬러 사인펜이 8절 갱지 위를 스쳐 다니기 10여분. 고개 숙여 책 읽는 한 남자가 갱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빼곡이 꽂힌 책장의 책들도 그대로 그림이 됐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머리, 작달만한 키, 60㎏도 안돼 보이는 왜소한 체구에 두껍고 커다란 스케치북을 든 남자 정씨. 시내버스 안에서, 어쩌면 서점에서 독자들도 한번쯤 지나쳤던 사람일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 주무대는 달리는 버스 안. 버스에 오르자마자 승객들의 표정과 몸의 자세부터 살핀다. 그림이 될성싶은 모델을 발견하면 주저 없이 갱지를 펴고 펜을 꺼낸다. 모델이 돼 주려 내릴 승강장을 지나치며까지 폼 잡아 줄 사람은 없다. 언제 내릴는지 모를 승객을 그려 내려면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야 한다. 버스가 서면 승객은 내리고 말지만, 승객이 있던 풍경은 8절 갱지에 고스란히 그림으로 남는다그의 그림 무대는 때로 지하철 역, 지하도, 서점… 등으로도 옮겨 간다. 사람 있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다. 그리고 모델은 대부분 노인과 아이들이다. 가장 오랫동안, 가장 빈번하게 모델이 됐던 사람은 78세 노모. 세월 따라 변해 가는 어머니의 초상을 무던히도 그렸다.

그림 재료는 간단하다. 컬러 사인펜과 8절 갱지가 전부. 때로는 신문지 위에다 볼펜으로 쓱쓱 그려대기도 한다. 물론 그의 그림이 항상 스케치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물감을 칠하거나 크레용으로 덧칠 하기도 한다. 한때는 유화 물감과 캔버스를 이용해 그럴듯한 풍경화도 그렸었다. 마산 바닷가를 고향으로 둔 사람답게 바다도 많이 그렸다. 푸른 바다 빛깔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풍경화를 그리려 먼 여행을 하던 그가 도시의 거리로 나선 것은 3년 전. 삶과 그림을 둘로 쪼갤 수 없다는 확신이 그를 거리로 이끌었다. 침침한 작업실에 갇힌 화가 혼자만의 창작을 일상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끌어넣고 싶더라고 했다. 예술가가 특별하거나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얘기였다.

버스 승객이나 서점의 학생, 지하도 걸인을 모델로 하는 데는 정씨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모델을 살 돈이 없기도 했지만, 이런 풍경이 가장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모습이라 믿었다. 버스 승객의 표정은 이 시대 서민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림은 삶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늘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다. 삶을 깨우치는 그날이 오면 그림도 완성될 것이라고 정씨는 말했다.

그런 그는 8절 갱지와 컬러 사인펜을 마련하기 위해 막노동과 공공근로를 해야하는 가난한 화가이다. 대학 근처엔 얼씬도 해본 적 없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일 역시 없다. 20여년 동안 혼자 그렸을 뿐이다.

다시 새해. 정씨의 소망은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20여년만의 첫 전시회를 한번 여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전시회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작품 될 만한 것이 없다 싶기도 하고, 전시회 열 공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해엔 용기를 내 보는 참이다.

둘째는 버스를 타고 오가는 얼굴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다. 새해엔 희망에 찬 서민의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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