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방은 "영원한 변경지대"

서울 반포세무서장에서 최근 대구지방국세청으로 옮긴 임정만 세원관리국장은 "서울에 비하면 대구는 '빈촌'"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서울과 대구의 경제력 차이에 대해 임 국장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서울 영등포세무서의 연간 세수가 10조원을 넘습니다. 반면 13개 세무서를 거느린 대구지방국세청의 99년 세수는 2조3천억원에 불과하지요. 수도권을 커버하는 서울 및 중부지방국세청의 연간 세수가 전국의 70~80%에 이르는 실정입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경제활동이 수도권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으로 봅니다"

임 국장의 얘기는 통계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1인당 내국세 납부지수를 전국평균 100으로 두면 수도권이 148, 비수도권은 57.4로 수도권이 3배 정도 앞선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소득격차가 매우 심각한 상황인 것이다.

세수 뿐 아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대한 경제력 집중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지방은 돈 구경하기조차 힘든 경제활동의 변경지대로 추락한 반면 서울은 돈이 흘러넘치고 있다. "서울만 있고 지방은 없다"는 말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게 한국경제의 현주소다.

▨흥청대는 서울

줄리아나 등 유명 나이트클럽이 몰려 있는 서울 강남 일대엔 주말 저녁마다 수천만원에서 1억원을 넘는 BMW, 벤츠, 이클립스 등 외제차들이 몰려든다. 에쿠스, 그랜저 등 국산 고급차도 간혹 눈에 띄지만 외제차의 위세에 눌려 명함조차 못내미는 분위기다. 이 일대 나이트클럽에 유명DJ들이 스카우트되고 난 뒤 이곳은 '황금족'의 주무대가 됐다.

황금족은 승용차 뿐만 아니라 옷도 고가 외제로 치장하고 있다. 남자들은 150만원이 넘는 아르마니 또는 베르사체 정장, 100만원대의 페레가모 구두, 500만원을 호가하는 카르티에 시계가 보통(?)이다. 여자들 역시 200만원대의 샤넬, 에르메스 정장에 60만원대의 에트로 핸드백을 들고 있다.

나이트클럽에서 황금족들은 한번 놀면 100만~200만원, 룸을 잡으면 400만~500만원 정도 쓰고 여자들과 부킹해서 나가게 되면 2배 정도 더 쓴다. 서울의 한 룸살롱 마담 이모(27)씨는 "재벌2세보다 무서운(?) 사람들이 부동산 졸부와 사채업자, 대형유흥업소 등의 자녀들"이라며 "하룻밤에 1천만원 이상을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정재계 2세 및 부동산 및 벤처졸부들이 대부분인 황금족은 다시 닥쳐온 경제위기에도 아랑곳 없이 '그들만의 향연'을 만끽하며 산다. 이런 황금족들간에 최근 유행하는 현상이 연예인과의 계약 동거. 한 재벌2세는 "톱탤런트, 영화배우 등 여자 연예인과 놀지 않은 애들은 황금족에 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1개월의 절반은 국내에서, 나머지 기간은 외국에서 지낸 뒤 헤어질 때는 최소 1천만원의 현금을 포함한 선물을 주는 것은 흔한 일"이라는 것이 경찰 정보통의 얘기다.

서울에 돈이 흘러넘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현장이 초고가 아파트. 지난해 서울의 LG빌리지(90평형) 분양가는 사상최고액인 24억5천만원이나 됐는데도 청약경쟁률이 23.8 대 1을 기록했다. 자재나 인테리어 등을 외제로 도배한 이들 아파트는 20억원이 넘지만 구매자가 넘쳐 없어서 못팔 정도다. 강북의 장충동 동부이촌동, 강남의 도곡동 서초동 일대의 빌라들도 20억~30억원을 호가하고 있다.

최근 서울 강남 로데오거리 업소를 조사한 국세청 직원들은 부유층의 과소비 실태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칵테일 바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5년간 53회의 해외여행을 했다. 그의 가게에선 양식 세트메뉴가 12만~25만원이나 됐지만 황금시간대엔 예약을 해야 입장할 정도다. 인근의 가방·의류점에서는 300만~1천만원대의 핸드백과 100만~800만원대의 의류들이 매장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특히 한 가게에서는 여성용 코트 1벌이 4천만~5천만원, 숄은 1천만원을 호가하는데도 찾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도를 넘은 경제력 집중

서울이 흥청대는 것은 한마디로 돈이 흘러넘치기 때문. 돈이 서울에 몰리는 이유는 수도권에 대한 경제력 집중을 가속화시키는 왜곡된 경제구조 탓이다.

수도권은 면적이 남한 전체의 11.2%에 불과하지만 100대 기업 본사의 88%, 공공기관의 90%가 몰려있다. 제조업체의 55%가 서울과 그 근처에 집중돼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방의 돈도 따라서 수도권으로 몰리고 있다. 전국 예금의 65.9%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미래에셋증권 정광주 대구지점장은 "주식투자자를 보면 대구에선 10억원만 넘으면 '큰 손'으로 대접받지만 서울에선 수백억 혹은 1천억원 이상의 큰 손들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서울에는 투자금액에 따라 100억원, 500억원, 1천억원 등의 클럽이 결성돼 있다. 특히 대구·경북의 큰 손 중에는 돈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가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정 지점장의 귀띔. "지방에선 정보를 얻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서울로 올라갑니다. 서울로 자금이 유출되는 것을 보면 씁쓰레한 기분이 들지요" 대구에 본사가 있는 금융기관조차 자금을 서울에서 운용하는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한 서울로의 자금유출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수도권의 경제력 집중은 지역 금융의 기반을 뒤흔들고 있다. 지난해말 대구에 본사를 둔 삼성투자신탁증권은 서울 삼성증권에 흡수합병됐다. 합병당시 삼성투신의 수탁고는 11조원.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조성된 이 돈이 삼성증권이 운용함에 따라 지역자금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간 셈. 삼성투신 한 관계자는 "돈과 기업들이 서울에 몰려 있기 때문에 금융기관은 서울로 갈 수밖에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수도권의 경제력 집중을 보여주는 지표들은 전국이 수도권의 '위성도시'란 현실을 입증하고 있다. 산업생산액의 45.9%가 수도권에 쏠려있고, 지방재정 규모도 중앙 대 지방이 69 대 31이다. 48 대 52인 일본과는 정반대 구도다.

▨수도권-지방 갈수록 격차

보다 심각한 문제는 수도권에 대한 경제력 집중이 갈수록 심화한다는 데 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경제활동이 가속화함에 따라 지방은 생산력과 산업기반이 더욱 취약해지는 실정. 지난해 수도권의 산업생산은 상반기 중 평균 24.5% 증가한 반면 비수도권은 평균 11.7% 증가에 그쳤다.

특히 미래주도산업이라 할 수 있는 정보통신업 경우 수도권 이외 지방의 비중이 업체수 11.1%, 종사자 7.7%, 생산액 2.2%에 불과, 수도권과 지방간 격차가 더욱 벌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부산시 정책개발실 초의수 연구위원은 "수도권에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의 82.7%, 벤처기업의 62.1%, 코스닥 등록기업의 77%가 집중돼 있다"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제의 일극체제가 강화,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99년 대구에서 서울로 본사를 옮긴 인터넷업체 나라비전의 한이식 사장은 수도권으로 기업들이 몰릴 수밖에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본사를 서울로 옮긴 뒤 매출이 3배 이상 늘었어요. 시장이 넓다는 것은 접어두더라도 정부의 각종 지원은 물론 대기업과의 거래에서도 지방업체보다 서울업체가 훨씬 유리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제품을 납품하는데도 일부 대기업은 지방업체일 경우 AS와 안전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가격을 절반 이하로 후려치지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여건이 되는 기업들은 지방을 버리고 서울로 몰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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