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할머니 여대생 김경자씨

63세의 여대생 김경자 할머니.미니 카세트를 주머니에 넣고 이어폰을 낀 모습이 환갑을 지난 나이엔 생경하다. 가끔씩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기도 한다. 놀랍게도 그 중얼거림은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 해외여행을 위해서, 혹은 취미 삼아 배우는 영어일까? 아니다. 그의 영어 공부는 취미도 사치도 아닌 치열한 학습이다.

김씨는 경북 외국어 테크노 대학 영어 통·번역과에 재학 중이다. 복장·말투·일과는 영락없는 스무살짜리 여대생이다. 사십살 이상 차이나는 동기생들과 수다 떨고 커피도 마신다. 리포트를 쓰느라 머리를 싸매고, 시험 치르느라 밤샘을 마다하지 않는다.

여느 학생들과 차이가 있다면 지독한 공부벌레라는 점.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엔 거의 하루 종일 공부만 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영어로 된 자장가를 틀어 놓는다. 스물 한두 살짜리 동기생들은 감히 흉내내기도 힘들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장학생이다.

1957년에 고교(경북여고)를 졸업한 김씨, 요즘 학생들이 많이 쓰는 샤프펜 쓰는 법을 몰라 하루를 꼬박 고민해야 했던 사람, 갑상선 수술 후유증으로 손이 심하게 떨려 글씨 쓰기도 힘들었던 사람, 그런 그가 대학 진학을 결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이를 먹었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흔히 공부는 젊어서 해야 한다는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젊어서 마음껏 하지 못했던 공부를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한다는 건 너무 억울했다.

아이들을 모두 결혼시킨 후에야 기회가 왔다. 시간도 충분했고 아이들 학비 걱정도 덜었으니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부터 좋아했던 영어를 전공으로 택했다. 내친 김에 박사과정까지 마칠 작정.

김씨는 학교에서 '이모님'으로 통한다. 아들뻘 되는 교수 한 분이 차마 이름을 부르지 못해 그렇게 불렀던 게 '화근'이었다. 이름을 불러 준다면 더 좋겠지만 '이모님'도 나쁘지는 않다. 어떤 수줍음 많은 교수님은 호명하지 않고 슬그머니 출석부에 '출석' 표시만 한다. 늘 맨 앞자리에 앉으니 굳이 이름을 부르고 말 것도 없다.

김씨에겐 공부가 무척 재미있다. 외국어 회화는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는데, 나이 덕분일까, 부끄럼 없이 술술 나온다. 어휘나 독해 능력이 젊은 학생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것만이 걱정거리. 더 많이 공부해야 할 것이라 일깨우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결혼한 자녀들이 어머니의 지나친 학습 열의를 염려한다. 취미 삼아, 대충대충 놀아가며 하라는 것이다. 밤잠을 설치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 그러나 김씨의 답은 간단했다. "뭐든 열심히 해야 재미있지, 재미로 해서는 정말 재미있는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하느니라". 이쯤 되면 자녀들도 두손 들고 물러 설 수밖에.

김씨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영어 공부의 핵심은 역시 사전 찾는 일인데, 시력이 나빠 늘 돋보기 안경을 써야 하는 것. 게다가 순발력도 젊은 사람들 보다 못하다. TOEIC 시험의 좁은 컴퓨터 답안지는 실력 부족에다 시력 부족까지 겹쳐 제대로 써넣기가 힘들다.

아직은 완벽하지 않지만 김씨의 영어는 참 쓸모가 많다. 그 중 하나는 한국 남자와 결혼한 필리핀 여성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일이다.

필리핀 출신 한국의 아내들은 너무나 이질적인 환경에서 어쩔 줄 몰라 하기 십상. 말까지 통하지 않으니 더 힘들다. 그런데도 한국인 남편은 걸핏하면 윽박지른다. 시어머니들도 두렵기만 하다.

김씨는 울음부터 터뜨리는 그녀들에게 한국의 남편들과 시어머니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한국어 글쓰기 지도도 그녀의 몫.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이자 영어를 공부하는 여대생인 만큼, 김씨의 영어는 홀로 이국 땅에 건너온 필리핀 출신 아내들에게 큰 힘이 된다.

방학 중이라 오랜만에 동기생들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김경자씨. 남자 같은 바지에 가벼운 점퍼를 걸쳤다. 주머니엔 휴대폰과 전자수첩이 들었다. 귀에는 이어폰, 신발은 물론 운동화. 너무 튀는 것 아니냐고? 천만에, 그녀는 이제 2학년에 올라가는 여대생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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