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타계한 운보 김기창 화백은 왕성한 실험정신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변신을 거듭한 한국화단의 거목이다. 타고난 예술혼과 활화산같은 창작열로 호평받았으며 청각 장애로 인한 침묵의 고통을 딛고 우뚝선 의지의 인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914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씨는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7살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신경이 마비돼 후천성 귀머거리 (전농)가 됐다.
그는 12살에 복학했으나 강의를 듣지 못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공책에 새, 꽃, 사람, 개 등을 그렸다. 아들의 소질을 알아본 어머니는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사사하도록 주선했고, 이는 그의 일생에 결정적 전환점이됐다. 이당에게 그림을 배운 지 6개월만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할 기회가 생기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운보(雲口甫)라는 아호까지 지어줬다.
이때문인지 운보는 1931년 선전에 '판상도무(板上跳舞)'라는 널뛰기 소재의 작품으로 입선해 일찍이 대가의 소질을 보였다. 당시 신문에는 귀먹고 말못하는 18살 소년이 선전에 입선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1937년 선전에서는 할머니에게서 옛이야기를 듣는 아이들 모습을 그린 '고담'으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광복 후 아호 운보 (雲口甫)에서 口자를 없애 장애의 굴레를 벗고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과 의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듬해 동료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했는데, 이는 그의 삶과 예술에 일대 전기가 됐다. 필담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데 한계를 느낀 그는 우향에게서 입으로 말하는 구화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아내의 작품세계에서도 크게 영향받았다.
한국전쟁은 그에게도 뼈아픈 고통이었다. 기만, 기옥 씨 등 동생이 사상 차이로 월북한 것. 그는 피난지 군산에서 조선시대 한국인의 모습으로 예수의 일대기를 그린 '성화' 연작을 2년에 걸쳐 제작했다.
전통 한국화의 평면구성에서 탈피해 입체 구성의 '노점', '구멍가게' 등 대표작을 제작, 입체파 선두로 나선 것도 이때였다.
이밖에 1천여 마리의 참새 떼가 양편에서 날아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담은 대작 '군작'은 운보의 표현적 특징과 스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60년대 들어 해외 화단에 나선 운보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가장 뚜렷한 변화를보이는 완전추상 '태고의 이미지', '청자의 이미지' 등 이미지 연작으로 한국화의 새 가능성을 제시했다.
부인이 60년대 후반 미국에 유학하자 적색, 황색이 주를 이루는 '태양을 먹은 새' 등을 발표하는 등 천변만화하는 작품세계를 과시했다. 이어 장식적 산수화 '청록산수'를 선보이고, 민화풍 산수화인 '바보산수'와 해학성이 돋보인 '장생도'도 차례로 발표해 호평받았다.
그러나 수차례 부부전을 가진 화업의 친구이자 인생의 반려인 부인이 1976년에 타계하자 그는 말할 수 없는 허탈에 빠졌다. 일생에서 가장 활발한 작업을 했던 게 바로 그 이후로,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그의 안간힘을 느끼게 한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대회고전'을 계기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발간위원회가 작품 4천여점으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전 5권)을 발간했다. 전작도록이 발간된 것은 그가 최초. 이 과정에서 그가 제작한 작품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30~40년대 작품 32점이 북한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음도 이 무렵 확인돼 화제가 됐다.
전농인 운보는 농아복지에 남달리 관심이 컸다. 세계 스케치여행중 선진국의 농아복지시설을 돌아보고 낙후된 국내 농아복지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농아복지회를 국제농아연맹에 가입시켰다.
거구였던 운보도 79세 때 심장질환으로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는등 만년에 건강문제로 고생을 했다. 그러다 지난 96년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뇌출혈 증세를 보이며 더이상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연말 제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는 월북했던 동생 기만 씨를 극적으로 만나 가슴아픈 가족사와 민족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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