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군 이서면 주민들은 지난해 말 눈물겨운 기쁨을 맛봤다. 폐교위기에 몰린 면내 칠곡초등학교를 자신들의 힘으로 지켜냈다는 승리의 환호였다. 58년의 역사를 가진 칠곡초교는 70년대 중반에는 학생수가 900명을 넘어 오전·오후반을 둬야 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의근 경북지사를 비롯해 쟁쟁한 인물들도 적잖이 배출했다. 그러던 학교가 이농현상이 심화하면서 쇠락을 거듭해 99년 11월말 학생 54명으로 졸지에 폐교 대상에 들어갔다.
주민들과 동창회가 팔을 걷어붙인 것은 폐교 협의가 한창 진행중인 지난해 10월. 학부모 42명에게 의견을 물은 결과 32명이 폐교에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이 학교 1회 졸업생 박형곤(68·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씨는 "동창회원들이 학부모들과 함께 정말 백방으로 학생수 늘리기에 나서 지금은 폐교 기준인 60명을 넘는 62명으로 일단 학교 문은 닫지 않도록 막았다"고 안도했다. 그는 "앞으로 동창회원 자녀 및 이서면 소재지 학생 전학운동, 대도시 거주 군내 공무원 자녀 유치 등을 통해 반드시 학교를 지켜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칠곡초등의 사례에서 눈여겨볼 점은 학부모들 대다수가 폐교에 반대한 사실이다. 학교 통폐합이 한창이던 지난 99년만 해도 자녀를 더 큰 학교로 보내려는 학부모들이었다. 이들이 이제는 고향학교 지키기로 U턴한 것.
소규모 학교 통폐합은 지난 82년 이후 꾸준히 이루어져 왔지만 현 정부 들어 급격하게 늘었다. 지난 99년에만 경북에서 152개 초등학교와 14개 중학교가 통폐합됐고 지난해 27개교, 올해도 15개교가 문을 닫거나 합쳤다.
학교가 사라진 농촌이 앓고 있는 병은 생각보다 깊다. 정부가 내놓는 여러 통폐합의 이점과 동떨어져 해당 지역 학부모와 주민들은 예상 이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육당국은 폐교를 아트타운으로 조성하거나 유·무상 임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대로 내팽겨쳐진 곳이 상당수다. 지역공동체의 중심지에서 흉물로 전락한 곳도 적지 않다.
더 나은 학교, 더 큰 학교로 자녀를 보내면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던 학부모들의 마음에도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 한시간 가까이 통학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는 것도 딱하거니와 바뀐 환경과 친구들, 갑자기 늘어난 공부와 경쟁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도 지켜보기 안타깝기 때문이다.
지방 교육의 실상을 무시한 중앙정부의 정책에 주민들이 적극 맞대응하고 나서는 것도 이같은 부작용을 곳곳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청도, 영천, 고령 등 경북도내 곳곳에서 학교 살리기에 나선 주민, 학부모들의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학교 통폐합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의성군 안계면 지역 학부모와 주민들은 최근 안계지역 중·고교 통합협의회를 결성했다. 지역 3개 중학교와 2개 고교를 통합, 경쟁력 있는 남녀공학 중·고교 각 1개로 만든다는 목표. "중3 졸업반 상당수가 다른 지역 학교로 옮겨가는 현실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정부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수년안에 시·군 단위 고교 대부분이 폐교위기에 직면할 것입니다"
안계면의 중학교는 학생수가 100명 안팎이어서 학년당 1개 학급에 불과하고 고교도 200명 안팎으로 2, 3개 학급. 지역 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수가 갈수록 줄어드는 현재 상황대로라면 대부분 학교가 폐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주민들은 학교간 통합으로 △소규모 학급 편성에 따른 열악한 교육환경 개선 △성적우수 학생 지역학교 유치 △학생간의 경쟁심 유발과 이에 따른 학습의욕 고취 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교육계 관계자들은 황폐해지는 농촌교육의 원인치료를 위해서는 이른바 '교육 탈농(脫農)'을 막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농촌학교의 교육여건을 개선시키는 한편 공교육 질 향상을 통해 사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지 않는 한 농촌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교육 위기와 사교육의 무한 팽창은 교육의 수도권 집중을 초래하고 있다. 공교육과 사교육 여건이 수도권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악한 지방 교육은 갈수록 피폐해져 '학생들이 떠나는 농촌'으로 만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 폐지. 물론 계속 시행할 경우의 폐해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방과 후 더 공부를 하고 싶어도 갈만한 학원조차 찾기 힘든 지방 학생들에겐 이 조치가 원망스럽기 짝이 없다. 교사들도 "수업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 있는데 혼자 알아서 하라고 한다면 대도시 학생들에 비해 너무 가혹한 일"이라며 "보충수업 관련 정책도 지역 여건에 맞춰 탄력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2002학년도 대입제도부터 중시되는 특기·적성교육도 마찬가지다. 특기를 기르거나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고 싶어도 농촌에서는 강사 구하기부터 하늘의 별따기다. 특기·적성교육 수익자 부담 원칙도 학생이 몇 안 되는 농촌에서는 과도한 부담으로 이어진다. 결국 교사들이 교과와 관련한 일부 과목만 개설해 진행하고 있다. 지방 학생들은 대학입시에서 대도시 학생들에 비해 몇 걸음 뒤처져 출발하는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02학년도 대입제도의 전체적인 방향도 지방학생들에게는 우려스런 쪽이다. 수시모집이 대폭 확대되고 심층면접이 주요 변수로 떠오르자 수도권 특수목적고 학생들은 내심 환호하는 분위기다. 말이 심층면접이지 본고사 문제를 구술로 푸는 형태로 치러질 경우 정보가 풍부하고 깊이 있게 공부해온 자신들이 유리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경시대회 수상경력을 비롯한 비교과 분야 점수 따기도 수도권 학생들에겐 유리한 요소.
김호원 대구 경신고 교감은 "예전처럼 고지식하게 공부에만 매달려서는 원하는 대학 가기가 힘든 제도"라며 "대학의 고교 평가까지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상황에서는 지방 학생들의 상위권대 진학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수도권 중심의, 획일적인 교육정책은 자녀교육과 대학진학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농의 결정적 원인이다. 도시로, 서울로 이어지는 학생들의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청송군의 경우 10개 초등학교 5학년생은 333명이지만 40명 가까이 도시로 전학가고 6학년 졸업생은 3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영덕군 내 중학교 졸업생 569명 가운데 200명 이상이 타지로 진학했다. 고교의 경우 아예 존폐를 걱정해야 할 학교도 적지 않다.
교사들이 느끼는 참담함은 더하다. 안동의 한 고교 교사는 "매년 2학기가 되면 교사들은 영업사원으로 전락한다"고 털어놨다. 신입생을 하나라도 더 유치하기 위해 중학교를 분담해 돌아다니며 식사대접, 기념품 제공까지 하는 게 과연 교사의 본분인가 하는 회의다.
지방교육 위기는 초중등 교육법 개정, 농어촌교육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정책적으로 풀어가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문제다. 학생수나 인구수를 기준으로 한 예산지원 차등 개선, 교육장비 보급, 교육비 지원 강화 등을 통해 지금까지 수도권의 부익부를 불러온 불합리한 점들을 개선하지 않고는 황폐화하는 지방교육을 되살릴 방법이 없다.
진정한 교육자치의 실현도 시급한 과제다. 교육부가 2004년까지 시·도 교육청에 이양하기로 한 집행기능을 하루라도 빨리 이양하고 지역실정에 맞는 정책결정권도 과감하게 지방으로 넘겨야 한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李대통령, 대북전단 살포 예방·사후처벌 대책 지시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대통령실 "국민추천제, 7만4천건 접수"…장·차관 추천 오늘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