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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와카야마현 지사 일행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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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로 국내에서 반일감정이 높은 가운데 일본 현(懸) 지사를 단장으로 한 대규모 방문단이 20일 대구와 경남 창녕을 잇따라 방문, 두 선인들의 묘소에서 고개를 숙였다.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 기무라 요시키(木村良樹) 지사 등 일한문화관광교류단 일행 130명은 이날 오후 창녕군을 방문, 김진백 군수의 환영을 받고 영산면 영산 로터리의 이진영과 아들 매계(梅溪)부자 현창비에 헌화·분향했다.

영산 출신 유학자 이진영은 1593년 23세때 왜장 아사노 유키나가(淺野幸長)의 포로가 돼 끌려가 기슈(紀州·현 와카야마)에서 서민교육기관을 차리고 조선 유학을 가르쳤다.

그의 학문이 깊다는 것을 들은 번주 도쿠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에게 "조선의 신하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수차례 거절하다 그의 시강(侍講)을 맡았으며 장남 매계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번주의 아들 미쓰사다(光貞)의 스승이 됐다.

그는 일본에서 기슈유학을 창시하고 끝내 조국을 버리지 않아 1984년 13대로 절손될 때까지 후손들도 이씨 성을 지켰으며 임란 400주년을 맞아 지난 92년 와카야마현과 영산주민들이 '유학의 위대한 선각자가 된 부자에 대한 은혜에 보답하고 영령을 위로하는 뜻으로'현창비를 세웠다.

지사 일행은 이에앞서 김충선 장군이 귀화해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고 정착한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마을에 들러 김장군을 모신 녹동서원과 묘를 참배했다.

김장군은 22살인 1592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했으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했다.

그가 조총과 화약제조법을 조선군에 전수하고 이괄의 난과 정유재란·병자호란에 참전해 큰 공을 세우자 조선 조정은 그에게 김해 김씨를 사성(賜姓)했으며 우록마을에는 지금도 후손 300여명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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